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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우 구자형
    오덕기(五德記)/韓 2009. 4. 25. 10:13



    60억의 다양한 생김새 만큼이나 다양한 목소리가 세상에는 존재하지만, 언제나 끌리고 찾게되는 것은 이 한 사람의 음성. 바로 성우 구자형의 목소리이다. 그의 목소리는 독특한 색을 지니고 있다. 온화함과 광기, 부드러움과 거칠음의 극단적인 양면성이 전혀 부대낌 없이 한 사람의 몸 안에 어우러진다. 혹여 선량하면서 심지가 굳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를 표현하라고 하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구자형의 목소리를 꼽을 것이다.  

    일전에 성우 오세홍의 목소리를 이야기하면서 가장 도가적인 목소리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상선약수, 물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의 소유자인 오세홍의 성색에는 가끔 도가의 니힐리즘적 나른함까지 함유되어 있는데 반해, 성우 구자형은 좀 더 정격이랄까, 중용이랄까. 도가가 가진 그 넓은 스펙트럼의 한 가운데 쯤에서 양 극단을 포섭하고 있다. 오세홍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아무리 밝은 역을 맡아도 그 목소리 끝에는 여지없이 허무함이 사무쳐오는 데에 비해(예를 들면, 짱구는 못말려의 철없는 아빠 역에서도, 세파에 찌들고 지친 허전함이 전해지는 것 같다) 구자형의 목소리가 밑바닥에 면면히 흐르는 고독함 속에서도 잔잔한 안정감을 주는 것은 아마도 이 차이 때문일 게다.

    목소리에 대해서 아무리 글로써 설명해봤자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일테니 이쯤에서 그만두고, 내가 구자형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야기나 해보겠다.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듯, 내가 성우 구자형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바로 SBS판 '마법소녀 리나(슬레이어즈)'의 제로스 역할이다. 내가 SBS라면 덮어놓고 싫어하지만, 90년대 어린이 시간대의 이 방송국의 노력 하나 만큼은 인정한다. 피구왕 통키, 마법기사 레이어스, 신세기 사이버 포뮬라, 에스카플로네, 카드 캡터 체리, 슬램덩크, 보노보노, 포켓몬스터, 쾌걸 조로 등등 굵직굵직한 애니메이션들을 방영하면서 시청률 몰이에 성공하여 동시간대 타방송국을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성우 열풍을 주도하면서 한국에서도 '성우'가 상품이 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돌풍의 중심에는 바로 슬레이어즈가 있었다. 비슷한 때에 신생 카툰 채널인 투니버스에서도 다른 성우진으로 구성된 슬레이어즈가 방영되면서 성우에 대한 담론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었고, SBS는 슬레이어즈 Try를 광고하면서 성우를 애니메이션 마케팅의 중추에 두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행보를 선보이기도 했다.

    제로스는 슬레이어즈의 두번째 시리즈인 슬레이어즈 Next에 추가되는 캐릭터인데, 처음 구자형이 이 캐릭터를 맡았을 때에 그는 제로스라는 역할이 한두 편이면 끝날 단역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92년 KBS 공채 성우로 입사한 지 5년만에 맡은 이 역할로 명실상부한 스타덤에 오르게 되었고, 애니메이션에서 여러 주요한 캐릭터를 맡음과 동시에, 외국 배우의 경우 양가휘와 키아누 리브스라는 미남 배우를 전담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애니메이션을 구분하는 잣대는 바로 '구자형이 나오는 애니메이션과 그렇지 않은 애니메이션'이었고, 오직 구자형이 주인공을 맡는다는 이유만으로 토할만큼 재미없는 영화와 만화영화를 챙겨볼 정도였다. 

    잠시, 그가 맡은 제로스 이야기를 한다면, 투니버스에서 제로스 역을 맡은 김민석과 일본판 제로스인 이시다 아키라와의 비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김민석의 제로스가 나이가 좀 들어보이면서 약간은 느끼한, 그러나 좀 더 악마적이고 음험한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면, 구자형은 아무도 정체를 알 수 없을만큼 선량하고 귀여운 제로스를 탄생시켰다. 개인적으로 이시다 아키라의 제로스는 김민석의 제로스와 좀 더 유사하다고 본다. 그들이 남성적이고, 너구리 같이 속을 알 수 없는 캐릭터를 구현했다면, 구자형의 제로스는 좀 더 가볍고, 좀 더 귀엽고, 좀 더 다양한 감정을 가진, 절대 미워할 수 없는, 아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캐릭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구자형만큼 제로스에 적역인 사람도, 김민석만큼 적법사 레조에 적역인 사람도, 이시다 아키라만큼 건담 seed의 아스란 자라에 적역인 사람도 없다고 본다. 



    어쨌든, 슬레이어즈 이후 다양한 애니메이션의 주요한 캐릭터를 맡으며 승승장구하던 그는 SBS에 야심차게 준비한 슬램덩크에서 불꽃남자 정대만과 양호열을 맡게 된다. 불꽃남자 정대만 역에 심취한 그는 굵직하고 거칠은 목소리를 내는 정대만 역을 소화하기 위해 담배를 더 태우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나는 그가 선량하고 의리있고 침착한 양호열 역을 훨씬 더 잘 소화했다고 생각한다. (잡설이지만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워낙 열심히 일 하시는 성우분이기 때문에 정대만의 그 유명한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는 대사의 배경음악을 직접 편집하기도 했지만 pd에게 거절당했다고 한다. -_-;) 그밖에도 엘하자드의 주인공인 엄수빈, 포켓몬스터의 웅과 해설, 비밀일기(그남자 그여자의 사정)의 제갈민, 세일러문의 거의 모든 남자 역, 봉신연의의 양전 등으로 활약했고, 내가 애니메이션만큼이나, 아니 애니메이션보다 더 좋아했던 텔레토비에서 해설 역을 맡아서 "이제 그만"이라는 매직 워드로 전파뚱땡이들을 다스리기도 했다. 

    1999년 그는 한국 애니메이션 더빙 역사상, 아니 전세계 애니메이션 더빙 역사상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한다고 혼자 주장하는(아마, 이런 주장하는 사람 몇 명 더 모을 수 있을 듯) 카우보이 비밥의 주인공 스파이크 역을 맡아, 그의 목소리에 스파이크의 영혼을 담아버리는 열연, 호연을 선보인다. 나는 한국판 카우보이 비밥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미국 포럼에서 애니를 볼 때 일본 성우 버전으로 볼거냐, 미국 성우 버전으로 볼거냐 가지고 토론할 때면, 적어도 카우보이 비밥은 한국성우 버전으로 보라고 강력 추천하고 싶을 정도이다. 구자형, 정미숙, 김기현, 양정화의 비밥호 식구들과 각 에피소드에 출연하는 각기 다른 성우들이 내는 앙상블의 하모니는 감동 그 자체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이누야샤의 미륵(미로쿠), 몬스터의 닥터 덴마, 은혼의 사카타 킨토키 등 주연급 캐릭터를 맡는데, 이들 애니메이션 캐릭터 연기에서도 무르익을대로 무르익은 연기력을 선보인다. 특히나 몬스터의 덴마의 역할은, 내가 만화를 보면서도 구자형의 음성을 떠올렸고, 그도 이 만화가 애니메이션화가 되기 전부터 덴마 역할을 하고 싶어했는데, 결국 캐스팅 되었고,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 엄청난 커리어 중에서도, 그 무엇보다 내게 구자형의 이미지와 일체화 되어 있는 것은 바로 KBS에서 2001-2년에 방영된 드라마 와호장룡의 무당파 수제자 이모백 역할이다. 도가적 목소리를 가졌다고 항상 주장해왔던 구자형이 맡은, 도가의 무학을 수련하는 제자 이모백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캐스팅이 또 있을까. 이모백은 순수하고, 맑고, 올바르며, 정의감 넘치고, 배려심 깊고, 부드러우며, 학문이 뛰어나나,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는데, 이 역할을 함에 있어 구자형은 본인의 원래 목소리에서 큰 변화 없는 목소리를 내며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그리고 왠지, 이 이모백 역할을 한 구심지와 구자형은 유한 생김새가 닮은 것 같아서, 구자형을 떠올리면 나는 이 이모백이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같이 떠오른다.


    나만 그런가? 캬캬


    최근들어 처한 상황 때문에 한국 성우의 목소리를 접하기가 어려워서 구자형 목소리 금단 증상에 시달리다가 보게 된 것이 영화 "신암행어사"인데... 영화가 이상한건지 (너무 잔인해서 좀 괴로웠다) 뭔지, 솔직히 주인공 문수 역을 맡은 구자형의 연기에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실망했다.) 그러나 진짜 이잡듯이 뒤져서 찾아낸 라디오 드라마 "그 해 여름"에서 김승준씨와 호흡을 맞춘 신들린 연기에 역시, 구자형이라는 찬탄이 나왔다. 



    구자형은 성우들 중에서도 외부활동을 열심히 하는 편이라 1999년 <옛날 방송국>이라는 인터넷 방송국을 개국하면서(이걸 개국이라고 해야하나) 한국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CD '천애'를 녹음하기도 했고, 성우의 권익이나, 애니메이션 인프라 등에도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더빙 뿐만 아니라, 그 특유의 자연스럽고 안정적인 목소리로 수많은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션을 했으며, 좀머씨 이야기라는 오디오 북을 녹음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60억가지의 다양한 목소리가 있는데, 그럼에도 내가 구자형의 음성을 가장 좋아하는 까닭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면서 진정성이 담겨 있는 깊은 울림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기계적으로 연기하지 않고, 이해하고 연기하는 좋은 연기자이기도 하다. 구자형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은지가 거의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이제야 글을 쓰게 된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우에 대해 글로써는 그 애정을 다 표현하지 못할까 저어되어서이다. 앞으로도 많은 애니메이션, 영화 캐릭터가 그의 목소리로 덧씌워지는 행운을 갖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