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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펌] 중국불교 신멸신불멸논쟁 - 차차석
    學而時習之不亦悅乎/문사철 2009. 2. 1. 03:59

    신이란 영혼이나 정신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신의 지속 여부는 윤회의 문제와 결부되어 일찍부터 중국 내부에서 많은 사람들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현실중심적이고 내세관이 명확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에게 윤회를 가르치는 불교는 매우 이질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전래 초기의 이러한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이혹론』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모자가 저술한 이 책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이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태어난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하고 묻자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되는 것이며, 귀신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모자는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다. 다만 육체만이 썩어질 뿐이다. 육체는 예컨데 오곡의 뿌리나 잎과 같은 것이고, 영혼은 오곡의 씨앗과 같아서 뿌리와 잎은 나오면 반드시 시들지만 씨앗은 끝이 없다. 그처럼 도를 체득한 사람도 육체는 소멸해 버리는 것이다.”라 말한다.
      이어서 “도를 닦아도 죽고 닦지 않아도 죽는다면 무슨 차이가 있는가?”하는 질문에는 “도를 얻으면 설사 육체는 죽더라도 영혼은 천당으로 가지만 악한 일만 행하였다면 죽은 후에 영혼은 재앙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인과응보설을 응용하여 이러한 대답을 이끌어 내고 있다.
      모자의 시대에 이러한 문제가 제기된 이후 불교의 보급에 따라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불멸이 가능한가에 집중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물론 영혼의 불멸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불교이며, 불교와 견해를 달리하는 사상가들 내지 종교에선 영혼의 소멸을 논증하기 위해 노력한다.
      따라서 4세기초 축승부의 『신무형론(神無形論)』이 출현하고, 여산의 혜원스님은 『사문불경왕자론』에서 <형진신불멸론(形盡神不滅論)>을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남북조 시대가 되면 정신의 멸불멸을 둘러싼 논쟁은 더욱 가열된다. 유송시대에 이 논쟁에 불씨를 지핀 사람은 혜림(慧琳)이라는 스님이다. 그는 『백흑론(白黑論)』을 지어 영혼은 항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더불어 소멸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혜림스님이 지은 『백흑론』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 혜림스님은 다른 스님들의 배척을 받았는데 유송의 문제(文帝)가 도움을 주어 바라이죄를 면하게 되었다. 이 무렵 하승천이란 고관이 종병이란 학자에게 편지를 보내 『백흑론』에 대한 평가를 당부했다. 종병은 이 글을 읽고 『난백흑론』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그것이 『홍명집』에 남아 있어서 혜림의 사상적 편린을 살펴볼 수 있다.
      종병의 글에 의하면 혜림스님은 “죽음의 이치는 인간세계의 일만으로 다할 수가 없다. 주공과 공자는 이 도리를 의심하였지만 밝히지는 못하였고, 석가모니는 말을 하고 있지만 진실이 아니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에서 영혼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전개했다. 그리고 그 논리의 바탕은 본래공무(本來空無)론이다.
      연기적 실상의 세계에선 상호의존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가 규정되지만 그것이 흩어지면 영혼이라 할 것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종병은 호교적 입장에서 혜림의 주장은 불교가 중국에 필요치 않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공격하면서 공이나 무(無)라고 하더라도 연기법 자체까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말하고 있다.
      그는 “사람의 몸은 매우 조잡한 것이나 사람의 정신은 실로 미묘한 것이다. 몸은 정신에 종속되며 결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고 하거나 “최상의 밝은 지혜와 가장 오묘한 뜻을 가지고 성심으로 그 신명을 다한다면 감응하여 신체를 받고 칠보정토(七寶淨土)에 태어나는 것이 어찌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인가”라 말하여 영혼의 불멸과 윤회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또한 종병은 『명불론』에서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지무(至無)한 도(道)에 돌아가는 것이니 모두 같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인연에 따라서 변천하고 유전하여 조잡하거나 미묘한 의식을 형성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근본정신과 함께 불멸이다.
      예컨데 순임금은 고(螺)에서 태어났지만 순임금의 정신은 역시 순임금 자신이 양육한 것은 아니다.마찬가지로 아들 상균의 정신 역시 순임금이 기른 것은 아니다. 생육 이전에 처음부터 조잡하거나 미묘한 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근본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성립된 것이므로 죽은 뒤에도 불멸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불멸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가 구별되며, 이지(理智)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나 성스러운 자나 생사를 되풀이 하는 가운데서도 불멸의 부분만은 변함이 없다”라 말한다. 종병은 『서응본기경』의 영향을 받아 정신에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도의 성격을 부여하면서 생사와 그 속에서의 수행을 지탱해 주는 것으로서 정신의 불멸을 주장하는 것이다.
      종병은 정신을 성불론과 결부시켜 정신이 불멸이므로 숙연의 작용으로 마침내 성불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부처 자체를 나타내는 법신에 대해서는 “정신이 지극하면 형체를 초월하여 정신이 홀로 있게 된다. 형체가 없이 정신만 있다는 것이 법신상주의 의미”라 말한다.
      종병이 자신의 영혼불멸설에 법신사상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이 당시에 불성론 내지 법신론이 중국에 원시적인 상태나마 전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8천송반야경』에서는 법신에 대해 “불타, 세존은 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비구들이여, 결코 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신체를 부처의 신체로 생각해선 안된다. 비구들이여 나를 법신의 완성으로 알지어다”(4장)거나 “실로 여래는 색신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여래는 법신이다”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야부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법신은 반야바라밀을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직 여래장 사상에서 말하는 법신사상과는 차이가 있다.
      종병의 뒤를 이어 신불멸론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정도자가 있다. 정도자는 현실 속에서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근원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정신의 본체는 빛으로 가득하고 미묘하게 신체를 통괄하며, 신체는 호흡에 의지하여 활동하고 정신을 깨달음에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다르다.
      이 두 가지가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며, 정신은 지극히 미묘한 삶의 본원이므로 육체가 소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나아가 정신을 현학에서 말하는 태극에 견주기도 한다.
      양대에 들어와 불교의 영혼불멸설에 반기를 들고 신멸론을 주장한 사람은 범진(范縝 : 450-515)이다. 그는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정신과 육체는 상즉하는 관계라 설명한다. 그의 『신멸론』에 의거해 몇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신이 소멸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정신이 바로 육체고, 육체가 바로 정신이다. 그래서 육체가 존재하면서 정신도 존재하고, 육체가 없어지면 정신도 없어진다.”
      또한 “육체는 지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정신은 지각이 있다. 지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별개인데 어떻게 상즉한다고 하는가?” 하는 질문에 “육체는 정신의 본질이며, 정신은 육체의 작용이다. 그렇다면 육체는 본질을 말하며, 정신은 작용을 가리킨다. 육체와 정신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하여 정신과 육체의 불가분리성을 주장한다.
      또한 감각의 위치 문제를 놓고 “육체가 정신이라면 손들도 정신이며, 손들도 생각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아픔이나 가려움 등을 지각하는 작용은 있지만 시비를 판단하는 사려는 없으며, 깊고 얕음의 차이는 있다”고 대답한다.
      나아가 “육체가 소멸하면 정신도 소멸한다면 『효경』에서 ‘조상을 위하여 종묘에서 제사를 함에 귀신이 흠향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하고 묻자 범진은 “성인의 교화가 그러한 것이다. 효자의 마음을 따라서 인정이 야박한 것을 꾸짖기 위함이다. 『주역』에서 ‘귀신이 그것을 밝혀준다’고 한 것은 이것을 지칭하는 것이다”고 대답한다.
      “『주역』에서 ‘귀신의 마음과 모습을 알아야 천지와 더불어 서로 비슷하고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으며, ‘귀신이 가득 넘쳐 있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사람이 되고 귀신이 되는 것은 어둠과 밝음의 차이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귀신이 사멸하여 사람이 되는 것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오히려 범진은 『답조사인』이란 글에서 사후에 영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설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서민을 교화하고 그들에게 효자의 마음을 심고 길러주어 조금이라도 경박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사회윤리적인 차원에서 성인과 서민을 구분하고 있는데 이것은 유교적 관점의 계급의식이 투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상에서 남북조시대를 통해 전개되었던 신멸신불멸론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은 신멸론자들은 불교를 배척하는 사람 내지는 이교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전개되었다. 반면에 불교도들 내지 불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윤회설 내지 성불론과 영혼불멸을 결부시켜 불교를 대변하는 것처럼 각인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논리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확보하고 있으나 논리의 전개상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그것은 신에 대한 해석이 다의적인 만큼 치밀한 논지의 전개가 힘들다는 점이다. 특히 정신의 소멸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신의 개념이 막연하고, 주창자의 입장에 따라 개념이 다르며, 특히 중국 고전을 인용하여 자신의 논리를 전개 내지 증명함으로써 중국적인 사유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정신을 윤회와 결부시켜 설명할 때 인과응보라는 차원에 한정하여 파악하는 단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정신 자체의 공성이나 연기성에 대한 사유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근본불교의 무아설에 의하면 불멸의 근원적인 실체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불교적 관점이다. 연기성에 입각하여 현실을 파악하고, 해체론에 입각하여 무아설을 전개한다.
      이것은 인도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혁파하고, 가장 인간적인 삶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부처님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염원의 발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에서 전개되는 신멸신불멸 논쟁은 근본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내에서도 삼론종은 4구분별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신불멸론은 4구분별에 의거해 보자면 상견(常見)에 해당하고, 신멸론은 단견(斷見)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모두 타파의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점에 대한 언급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자신의 교양과 호오에 의지하여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그 논리가 주로 중국의 전통적인 고전들이라는 점에서 한계를 노출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윤회가 생물학적인 반복 내지 생사의 반복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불멸의 실체가 있어서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지속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이런 점은 초기불교 이래 불교사상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유식사상에서도 윤회를 식의 연생연멸(緣生緣滅)이 반복되면서 유지되는 것이라 설명하여 무아설과 사상적으로 배치되는 것을 피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불교의 본령을 벗어나 중국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http://www.cheontae.org/kumkang/2002/05/1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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