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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선약수(上善若水), 물과 같은 목소리를 가진 성우 오세홍님
    오덕기(五德記)/韓 2009. 3. 12. 10:16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되 다투지 않고, 뭇사람들이 꺼리는 곳에 처하기에 道에 가깝다.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고, 마음가짐은 그윽하게하고, 벗을 사귈 때는 어질고, 말할 때는 믿음직스럽고, 다스릴 때는 순리대로하고, 일 할 때는 능하며, 움직일 때는 때를 잘 탄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도다. (내 해석 -_-; )

    The best of man is like water, Which benefits all things, and does not contend with them, Which flows in places that others disdain, Where it is in harmony with the Way.
    So the sage: Lives within nature, Thinks within the deep, Gives within impartiality, Speaks within trust, Governs within order, Crafts within ability, Acts within opportunity.
    He does not contend, and none contend against him.

    -도덕경 제8장

    (내가 해석한 것도 의역 대박이지만, 영어 버전은 의역의 결정체. 하지만 이해하기는 쉬운 듯)



    아마도 노자사상의 정수는 바로 '상선약수'라는 말에 함축되리라. 도가적 삶에 대한 일종의 노스탤지어를 가진 내게 이 말은 교조와도 같다. '물' 같은 것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기는 어렵겠지만, 살다보면 가슴으로 '물' 같음을 느낄 때가 있다.
    (언부진의(言不盡意)라고 해야하나...이래서 중국위진시기에 현학이 발달한게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구나. 닿았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성우는 이 '상선약수'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목소리를 가진 분이다.

    오세홍,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성우라는 일에 몸 담으신 이 분은, 나를 처음으로 성우의 세계에 흥미를 갖게 한 분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성우에 관심을 가지게 된 후부터 점차 오세홍님의 목소리는 내 귀에 물 흐르듯 스며들어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어디에서부터 그 분의 목소리를 접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좋아했던 목소리를 꼽자면, <삼국지>의 제갈공명 역, <천공전기 슈라토(혹은 천하뮤적 슈라트)>의 인드라 역, 그리고 <마스터 키튼>의 다이치 히라가 키튼이다. (물론 <아기공룡 둘리>의 마이콜, <짱구는 못말려>의 아버지, <빨강머리 앤>의 길버트 역으로 더 유명하시다)

    오세홍님의 목소리는 앙칼지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무리하지 않는, 딱 물과 같은 목소리이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은 열혈도 아니고, 추상같지도 않다. 제갈공명을 떠올리면 알듯 모를 듯한 미소에 심모원려함을 숨기고, 학창의를 표표히 나부끼며 백우선을 부치는 모습이 절로 연상된다. 거기에 오세홍님의 목소리가 더해져서 그 신선 같은 캐릭터가 잘 살아났다.

    <마스터 키튼>의 다이치 히라가 키튼은 어떠한가. 세상 모든 것을 꿰뚫을 듯한 지적 능력에 군사적 기술까지 갖추고 있지만 일견 순박해 보이는 겉모습을 가진 키튼은 오세홍님이 아니고서는 소화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따뜻한 휴머니스트이자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겨나가는 마스터 키튼에게 덧씌워진 오세홍님 목소리는 누가 뭐래도 적격이다. 마스터 키튼 만화 자체도 도가적이고, 오세홍님 목소리도 도가적이고. 껄껄
    (애니가 나오기 전, 마스터 키튼이라는 만화를 보면서 오세홍님의 목소리를 상상했었고, 몬스터를 보면서 덴마 목소리에 구자형님을 상상했는데, 모두 캐릭터가 그렇게 결정되었더라. 껄껄,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일게다.)

    그리고 <천공전기 슈라토>의 인드라. 오세홍님으로선 드물게 악역이다. 그리고 가장 인상깊은 악역이었다. '나쁜 놈'의 전형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무리하지 않고, 숨겨져 있는 강함을 드러내는 목소리였다. 인드라가 <천공전기 슈라토>의 그 어떤 인물들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그 초월적이고 부드러움 속에 숨겨져있는 신묘불측한 힘을 잘 표현해 낸 오세홍님 덕분일게다.

    내가 여러 성우분들 중에서 물과 같은, 가장 도가적인 목소리를 꼽으라고 한다면 첫번째가 오세홍 님이고, 두번째가 구자형 님이다. 알고보면 구자형님이 가장 존경하는 선배가 오세홍님이라고 하니 두 분 사이의 공통점도 당연해 보인다.

    오늘 문득 생각나서 오세홍님 블로그를 찾아가봤다. 예전 홈페이지 시절 방문한 이후 근 10년만인 것 같다. 블로그 제목은 "어느 미친놈에게 가는 마지막 비상구 6" -_-;;

    택시운전을 시작하셨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사고가 나신 것 같더라.
    쓰신 글들이 하나같이 애이불상(哀而不傷)하니, 읽는 사람은 더 처연해진다.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듯, 그 물과 같은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다.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