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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영화] 매란방(梅蘭芳, Forever Enthralled 2008)
    오덕기(五德記)/中 2009. 5. 2. 12:49

    1. 웹서칭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영화 제목이 '매란방'이었다. 나는 평소 영화 보기를 그리 즐기지 않지만, 이 영화는 봐야만 했다. 

    2. 영화를 보기에 앞서 여명과 장쯔이가 나온다는 것은 알았다. 처음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에 주인공 매란방 역을 맡은 사람이 잘 모르는 젊은 남자배우이길래 여명과 동명이인인 다른 배우가 주인공이구나 했으나, 여명의 청년 시절을 맡은 것 뿐이었고, 여명은 여지없이 등장해주셨다.

    3. 영화를 다 보고 나서야,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패왕별희'로 유명한 첸카이거임을 알았다. 결국 첸카이거의 커리어 하이는 '패왕별희'인가. 

    ※ 인명은 한자를 한글 발음으로 독음했으나, 진개가 감독과 장자이는 우리에게 좀 더 친밀한 첸카이거와 장쯔이로 표기했다.






    WARNING: Thar Be Spoilers Ahead!
    스포일러와 혹평 경계령!!!

    대학교 2학년 때던가, 북대에서 교환교수로 온 선생의 강의를 들었는데, 그 양반은 경극 이야기를 하면서 매란방이라는 사람에 대해 언급했었다. 영화 패왕별희 덕분인지, 삼국지 덕분인지, 당시 경극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한달음에 도서관에 달려가 "경극과 매란방"이라는 책을 찾았었다. 그러나 엄청난 경극 용어의 홍수에 질려 나중에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며 책을 덮었고, 이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단 한번도 그 책을 펴보지 못했다.

    그렇게 그의 이름을 잊은지 수년만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매란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영화에 저절로 눈이 갔다. 화려한 경극의 공연 장면만 봐도 즐겁겠구나 하는 마음에 무려 2시간26분의 러닝타임에 굴하지 않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오르는 시점에서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한 줄로 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술성과 상업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놓쳤다."

    첸카이거는 이 영화에서 매란방의 '배우'로서의 일대기를 담으려고 시도한다. 먼저 매란방이 명망 높은 경극 배우 집안임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바로 매란방과 그의 배우 인생의 절대적 지지자인 구여백의 만남에 대해 다룬다. 구여백은 유학까지 다녀온 법관이었으나 매란방의 연기에 반해 그를 지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 그 덕분인지 매란방은 전통적인 기존의 경극에 대해 변화를 꾀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매란방의 스승인 십삼연과의 갈등을 야기하였다. 결국 매란방과 십삼연은 3일 동안 각기 자신의 스타일로 연기를 하면서 어느 쪽이 관객에게 인정받는 지를 두고 연기 인생을 걸고 맞서게 된다. 


    십삼연과 매란방      

    첫날의 공연은 십삼연이 승리하지만 둘째 날에는 새로운 경극을 들고 나온 매란방이 승리한다. 그리고 마지막 날, 십삼연은 최고 배우로서의 자신의 입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주위의 만류를 물리치고 다음의 공연을 한다.

    십삼연


    나는 비록 경극에는 문외한이지만, "열흘 만에 정군산을 점령하지 못하면 내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을 듣는 순간, 지금 십삼연은 촉의 장수인 황충으로 분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결국 노장인 황충은 위의 하후연을 꺾고 정군산을 점령하였지만, 극 중의 십삼연은 젊은 매란방을 꺾지 못하고 처참하게 패배했다. 이는 매란방이 경극을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젊은 매란방으로 분한 여소군





    매란방과 맹소동      

    십삽연이 죽고 매란방은 혼인을 한다. 이때부터 청년 매란방을 연기했던 여소군의 바톤을 이어받아 여명이 매란방 역할을 한다. 여명으로의 전환은 더이상 즐거운 경극 관람은 기대하기 어려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소군이라는 배우는 막눈으로 보더라도 이쪽 훈련을 받은 듯 어색하지 않은 경극 배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여명은, 평소의 자세도 단아하고 꼿꼿한 여소군과는 달리 좀 퍼지고 너부데데한 매란방의 모습을 유감없이 과시한다. (확신컨대, 절대 의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에 초반에 경극 공연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영화는 중반 여명의 투입과 함께 매란방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추적하는 쪽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일대기의 중요한 전환에는 바로 맹소동이 있었다.

    매란방과 맹소동의 첫 만남매란방과 맹소동이 한 무대에 선 모습

    매란방과 맹소동


    남성전문배우인 맹소동과 여성전문배우인 매란방의 만남은 무언가 묘하다. 감독은 그 괴리감에서 오는 둘 사이의 심리 변화와 이미 결혼한 매란방의 조강지처와 맹소동과의 관계, 맹소동과 매란방의 아내인 지방과의 서로에 대한 질투심, 그리고 매란방의 지지자인 구여백과 맹소동의 갈등을 섬세하게 묘사할 수도 있었다. 그것이 힘들었다면 둘 사이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에라도 천착해야만 했다.  그러나 첸카이거는 그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세기적일 수 있었던 그 둘 사이의 사랑이 남긴 것은 '영화도 마음대로 보러 갈 수 없다고' 징징 거리는 매란방 뿐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장쯔이(맹소동 역)의 등장과 함께, 무언가 재미있어질 것 같은 기대감에 다시금 집중력을 발휘하여 관람하던 나는, 장쯔이가 완전히 영화에서 사라질 때쯤에는 첸카이거 감독에게 묻고 있었다. "what on earth is your problem?"

    이 흥미로운 주제를 그 어떤 가슴 떨림 하나 없이 밍밍하게 끝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만약 감독이 남녀상열지사 따위에 집중할 생각이 없었고, 맹소동과의 만남이 매란방이라는 사람을, 그의 정체성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설명하고 싶었다면, 안타깝게도 그 의도 또한 실패했다고 하겠다. 맹소동과의 만남이라는 중요한 장면은, 단지 장쯔이의 등장으로 화면이 좀 더 밝아졌다는 장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울림 없이 끝나버렸다.





     


    매란방의 성공 뒤에는...      

    맹소동과 헤어진 매란방은 구여백의 헌신적이다 못해 삐뚤어진 지원 아래 미국 무대에 진출한다. 성공인가 실패인가, 이 극적인 긴장감조차 영화는 놀라울 정도로 미적지근하게 다룬다.

    미국 공연


    이제 영화에는 미국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하고 중국으로 돌아온 매란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일본 무리가 등장한다. 영화 후반부는 일본의 치하에서는 공연을 하지 않겠다는 '애국자적' 예술가 매란방에 대한 이야기로 꾸며진다. 더이상 공연을 하지 않겠다는 매란방의 선언은 매란방의 경극을 위해 전생애를 바친 구여백과의 단절을 의미하기도 한다. 온갖 더러운 꼴을 보면서도 공고했던 그 둘의 관계는 이렇게 어그러져 간다. 그들의 재회는 일본이 물러간 후에나 가능한 것이었을까.

    여성역을 하는 매란방이 수염을 길렀다는 의미는...






    첸카이거는 무엇을 두려워 한 것인가      

    첸카이거는 영화 속 인물들을 관조적이다 못해 시종일관 액자 안에 들어가 있는 듯 데면데면하게 다룬다. 패왕별희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발악하다 스러져간 한 배우의 인생을 '패왕별희'의 고사와 씨줄 날줄이 촘촘하게 얽히듯 그려냈다면, 영화 '매란방'은 중국 예술의 혼이자 영웅이라 할 수 있는 매란방의 굴곡 많은 삶을 단선적으로 나열하는 데 성공했다. 이 영화 어디에서도 격정을 읽을 수 없고, 그 어느 장면에서도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다. 우아하고 점잖은 매란방은 예술가의 광기가 결여되어 있고, 구여백이 매란방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예술가로서의 '고독감'조차 영화를 보는 관객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드는 생각은 "첸카이거는 무엇을 그리 두려워 했던 것인가"였다. 매란방 학파(매파)와 매란방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중국인들의 기대와 관심 속에 첸카이거는 매란방에게 작은 생채기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일까. 따라서 인생의 가장 큰 오점 일 수 있었던 맹소동과의 이야기도 플라토닉 러브 이야기로 그려내야만 했던 것일까. 자칫 일제에 굴복했다고 보여지는 상황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중국의 혼인 매란방은 일본의 압제에 영웅적으로 애국적으로 맞섰다고 묘사해야했던 것일까. (영화 엽문과 미묘하게 겹치는 부분이다)

    영화 내내 은근히 풍기는 민족주의는 거슬리고, 여러 사건들을 전혀 극적 긴장감 없이 다룬 방식은 실망스럽고, 사건과 사건간에 연결고리를 더욱 미미하게 한 편집 기술은 어이없고, 과도하게 여러 사건들을 다루려고 한 것은 과욕이었으며, 하나같이 몰개성적인 인물들은 아쉽다. 그리고 여명의 연기는 통탄할 노릇이다. 단아한 행동은 그렇다 쳐도 왜 그는 영화 내내 속삭이는가. 그렇게 밖에 여성역을 업으로 삼은 매란방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인지. 구여백과의 관계에서도 백이 숙제 고사는 왜 끌어들였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의 미덕은 십삼연을 맡았던 왕학기의 연기, 아름다운 경극 장면, 북경방언을 사용하는 생동감 있는 묘사외에는 찾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대한 나의 평에 쐐기를 박아보겠다.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의 3년간의 노고가 서린 이 영화는, 첸카이거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점을 펴냈다는 아래의 책 "매비색무梅飛色舞"의 표지만큼도 매란방의 복잡미묘함을 표현해내지 못했다.
    정말 안타깝다.
    첸카이거 감독도, 매란방도.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