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없습니다.
한 때 문학 동아리에 몸 담았었다. 대동제나 동아리 연합에서 하는 축제 기간에는 문학회 나름의 특정한 행사를 하곤 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작가와의 만남'이었다. 어떤 작가를 초대하느냐는 논의의 쟁점이 되었었고, 그때마다 꼭 거론되었던 이름이 있다. 바로 '김영하'이다. 대학생들에게 그는 기발함과 감수성으로 무장한 인기 작가였다. 덕분에 문학 동아리에 있으면서도 소설 읽기를 귀찮아 하던 나조차도 김영하 씨의 단편 한 두개 정도는 읽을 정도였다.
최근, 그런 독특한 감성과 상상력의 대명사인 김영하 씨의 장편 소설 '퀴즈쇼'가 뮤지컬로 변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책은 읽은 적이 없지만 꽤 매혹적인 원작자이고, 매력적인 장르이다.
-잡설
그 동안 꽤 많은 뮤지컬을 봤지만, '넌센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국에서 본 뮤지컬이다. 그곳에서 뮤지컬을 보는 동안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첫째, 과연 한국 뮤지컬 배우들이 미국 배우들의 수준을 따라올 수 있을까. 절대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다. 그곳에서 뮤지컬을 보면서 이들은 아주 어려서부터 뮤지컬 배우로 키워진다는 점을 알았고, 뮤지컬이라는 장르 자체가 대단히 서구적, 혹은 미국적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칫 오바스럽게 보여지는 연기는 평상시의 미국인들에게도 자주 볼 수 있는 발성이며 몸짓이었다. 뮤지컬의 저변이라는 측면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뮤지컬 배우를 꿈꾼다. 평생을 자기의 직업과 뮤지컬 배우라는 투잡으로 뛰는 것도 다반사이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나라의 뮤지컬의 토양은 척박하기만하다. 몇몇 대중가수가 약간의 훈련으로 주연을 맡는다는 점도 이러한 우려와 일맥상통한다.
둘째, 내가 과연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면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_-; 노래로 가사를 읊조리면 알아듣기가 힘들어진다. 미국에서는 내가 영어를 못하니 그러려니 했는데, 과연 이게 우리나라말이여도 그럴지 궁금했다.
퀴즈쇼라는 뮤지컬을 보면서 이 두가지 궁금점에 대한 어느정도의 답변을 얻었다.
첫째, 최고 수준의 배우는 미국 배우 수준에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전반적인 배우의 수준은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난다.
둘째, 난 한국말로 노래를 불러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허다하다. -_-; 어딜가나 사오정끼는 여전하다. 에휴...
잡설은 고만하고 뮤지컬 퀴즈쇼에 대해서 떠들어보겠다.
창작 뮤지컬답게, 그리고 소위 말하는 신세대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작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것 답게, 이 뮤지컬은 매우 새로웠다. 특히 무대 장치적 측면에서는 저 장면을 저렇게 표현하다니! 하면서 감탄하기도 했다. 안무와 노래적 측면에서는 사다리를 가지고 스펙을 표현하고 그것으로 노래에 맞춰 춤추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까지가 이 뮤지컬에 대해 줄 수 있는 내 찬사의 끝이다.
뮤지컬 퀴즈쇼는 각 캐릭터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지 못했다. 주인공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고, 마지막에 굳은 결심을 내리는 순간에도 한없이 나약해 보이기만 했던 그 아이가 왜 갑자기 저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지 궁금하기만 했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의 성격도 딱히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지원이는 우린 서로 닮았어만 외치다가 뜬금없이 사랑에 빠진다. 퀴즈회사에서 만나는 캐릭터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뮤지컬 퀴즈쇼는 마지막 객석에서 빠져나올 때 내 입에서 맴돌게 할 만한 메인 멜로디를 만들지 못했다. 나는 좋은 뮤지컬은 공연이 끝나고 나올 때쯤 그 뮤지컬에서 테마로 잡았던 노래 하나 정도는 부르면서 나오게 해야 한다고 철썩 같이 믿는다. 이를테면 코러스 라인을 보면 따 따다 따따다 따따다 따따다 -_-;;; 의 One이라는 곡을 흥얼거리게 되고, Jesus Christ Superstar를 보고 나와서는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고 외치게 되며, 에비타를 보면 Don't cry for me Argentina~의 멜로디가 입에서 맴돈다. 이렇듯 메인테마 곡이 다양한 변주를 통해 뮤지컬을 관통해서 공연이 끝날 때 쯤에는 귀에 절로 익어야지 성공한 뮤지컬 음악인 것이다. 그러나 퀴즈쇼에는 귀에 딱 꽂히는 그런 노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이 노래를 노래로 하고 왜 이 대사는 대사로 처리했는지 조차도 불명확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대사를 노래로 처리해서 여러번 반복했었어야 했는데, 단순히 대사로 처리한 것도 안타까웠다.
뮤지컬 퀴즈쇼는 내용이 어렵고 유머가 없었다. 나같은 범인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중간중간 설치해놓은 상징적인 측면이나 메시지를 캐치하기가 쉽지 않다. 어찌나 진지하게 만드셨는지 하나라도 놓칠세라 뒷골이 빠개질라 그런다. 기존의 유명하고 성공한 뮤지컬이 지독할 정도로 단순한 선악 구조나 갈등관계를 중심으로 한 스토리 텔링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단순한 구조에 재미라는 살과 볼거리를 붙이는 것이 기존 뮤지컬이었다면 (물론 이런 지나치게 단순한 선악구조 때문에 어이가 없었던 뮤지컬이 있긴 했다. High School Musical 2라고 -_-; 어쨌든 이 뮤지컬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점을 유의할 것 -_-) 퀴즈쇼는 어떻게 소설의 내용을 잘 따라갈까에 급급한 모양새였다. 이러다보니 유머가 절로 빠지게 된다. 공연을 보면서 웃은 건 배우들의 실수 때 뿐, 상황으로 웃기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어려운 내용과 유머의 부재 - 뮤지컬 퀴즈쇼의 가장 큰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아, 진짜 나라는 인간 공연 재미있게 다 보고 나서 이렇게 가혹한 글만 썼지만... 한국 창작 뮤지컬의 실험정신이 궁금한 사람에게 꼭 권하는 바이다. 더불어 뮤지컬 중간에 연기자들이 퀴즈를 맞히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과연 몇 문제나 맞힐 수 있는지 체크해 보는 것도 퀴즈를 즐기는 사람에게는 쏠쏠한 재미일 듯. 난 4문제를 맞혔... ㅋㅋ (6문제였나? 5문제는 기억나는데 한 문제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원...)
*참고로 이 공연은 Tistory에서 하는 공연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가게 된 것이다. 서울에서 오랜만에 운전대 잡느라고 약간 어지러웠고 (뭔 놈의 외제차가 이리도 많은지 ㄷㄷㄷ) 날씨도 쌀쌀했지만 오랜만에 간 예술의 전당도 반가웠고, 공연 후에 엄마 손에 끌려간 서예 전시회도 꽤 볼만했다. 어머니와 함께 이런 공연을 볼 수 있게 해준 Tistory 이벤트 진행 측에게 다시 한 번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