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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 부다페스트 - 영웅 광장, 바이더후녀드 성, 세체니 목욕장, 겔레르트 언덕(2019.06.05)
    여행/체코-헝가리 2020. 6. 1. 16:51

    한숨 자고 일어나서 밖을 나와보니 땅도 잔뜩 젖어있고, 공기가 축축하다. 우리가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한바탕 비가 퍼부은 듯싶었다. 친구는 종종 나를 하레온나(晴れ女)라고 부른다. 아무리 여행 전 일기예보에서 폭풍우가 예보되어 있어도, 여행만 시작하면 날씨가 쾌청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여지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였다. 심지어 잠시 숙소에 들어와 쉬는 사이에 비가 오고, 밖으로 나오면 날이 개는 식이다. 여행마다 타는 듯한 햇빛에 고통받은 기억은 있어도 비가 추적추적 내린 기억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고 출발. 행선지는 영웅광장(Hősök tere, 회쇠크 광장), 세체니 목욕장(Széchenyi Gyógyfürdő és Uszoda). 바이더후녀드 성(Vajdahunyad Castle) 등이 있는 시민공원(Városliget)이다.

    유럽대륙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지하철 M1을 타고 이동하였다. 오래된 지하철을 기념으로 남긴다며 괜히 노란 출입구 앞에서 사진 한 방을 찍고 앞에 멀찌감치 보이는 영웅 광장으로 향하였다. 수학여행 온 듯한 학생들이 영웅 광장의 기념물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영웅 광장은 헝가리 건국 천년을 기념하여 1901년에 조성된 광장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으로 헝가리를 이끌었던 위인상 14명이 연대순으로 서 있다. 가브리엘 아래에는 마자르족 7부족장이 있고, 가브리엘은 한 손에는 헝가리 성 왕관을, 다른 한 손에는 헝가리 창업주인 이슈트반의 기독교화를 뜻하는 대주교 십자가를 들고 있다. 이 영웅 광장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동화 같은 광경이 펼쳐진다.

    바이더후녀드 성은 건국 1000주년 기념행사용으로 축조한 것으로 마자르족이 헝가리에 도착한 후의 모든 건축 양식, 즉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을 재현하였다. 원래는 행사가 끝난 후 철거할 계획으로 카드보드지와 나무로 지었으나, 반응이 너무 좋아 아예 벽돌로 제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반응이 좋을만하다.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인공 호수까지 조성해서 이렇게 예쁘게 만들어 놓으면 구경하기 좋지 않겠는가. 이곳은 인적도 드물고 풀숲이 우거져있어 고즈넉한 기분을 느끼며 산책하기에도 참 좋다. 건물 중에는 농업박물관도 있다고 하는데 이미 늦은 시간인지라 모두 문을 닫은 듯하였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보면 아노니무스(Anonymous Statue)라는 음침한 동상이 보인다. 동상 제목도 '익명'이고, 얼굴도 후드를 푹 눌러썼다. 듣자 하니 벨라 3세 때의 궁정 사관으로 마자르의 역사 <헝가리인의 업적록 Gesta Hungarorum>을 저술했다고 한다. 이 책은 헝가리 중세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이며, 여기에 7부족장이 어떻게 도나우의 카르파티아 평원에 도착했는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상의 반짝이는 펜촉을 만지면 공부에 행운이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남들 만지는 거 잘 안 만지는 결벽증 환자이지만, 괜히 혹해서 펜촉을 꼭 잡아보았다. 

    그렇게 바이더후녀드 성을 돌아본 후에는 세체니 목욕장 쪽으로 향하였다. 부다페스트의 목욕장 중 가장 규모가 크다는 이 목욕장 앞에는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흉상도 있다고 하는데, 친구와 나는 이 사람이 그 사람 같냐며 수많은 흉상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러나 동양인의 얼굴은 찾지 못했다. 나는 온천과는 거리가 먼 인간인지라, 애초에 목욕장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는데 내부를 구경하지 못한 것은 좀 아쉬웠다. 더 알아봤어야 했는데, 지나치게 깨끗한 뇌로 이곳을 방문했다. 게다가 해가 떨어질 시간이 가까워졌다. 겔레르트 언덕에 올라가서 석양을 보는 것 이 버킷 리스트인지라, 친구와 나는 다시 지하철을 타고 급히 겔레르트 언덕 쪽으로 향하였다.

    겔레르트 언덕은 헝가리를 기독교로 개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이탈리아 베네딕토 수도사인 겔레르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그는 초대국왕 이슈트반의 초빙을 받아 궁성에서의 교육을 담당하였는데, 기독교를 거부하던 세력에게 사로잡혔다. 이들은 겔레르트를 안쪽으로 못이 박힌 통 안에 넣고 이 언덕에서 굴려서 죽였다고 한다. 이 순교자의 이름을 따서 언덕 이름을 겔레르트라 지은 것이다. 

    언덕 초입 쪽에 왼쪽으로는 겔레르트 온천 호텔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예배당이 있다. 호텔은 아르누보 양식으로 세워진 고급 온천 호텔인데 뒤를 돌아서 언덕을 오르다보면 멋진 실외온천이 눈에 들어온다. 예배당의 경우 원래는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에 수도사들이 예배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때 종교를 탄압하던 공산정권에 의해 박해를 받기도 했으나 1989년 헝가리 자유화 이후 개방되었다고 한다. 

    조금씩 위로 가다 보면 놀이터도 몇 군데 있다. 나는 평소 놀이터를 좋아해서 잠시 클라이밍 놀이터에서 놀고 싶었지만 친구가 컨디션이 좀 안 좋아 보인다. 더 올라가니 나도 등산에 지쳐버렸다. 은근 언덕 오르기가 고되다. 그렇게 한참 올라가니 전망대가 있어서 탁 트인 도나우 강 전경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자유의 여인상은 멀어 보인다. 

    전망대에서 잠시 쉬며 체력을 보충한 후 언덕 정상에 올라가니 온 세상 사람들 여기에 다 모여있다. 자유의 여인상은 오전에 부다 궁전에서도 보면서 궁금했었는데, 굉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기념상 뒤쪽으로는 치타델라라는 요새가 있다. 이 요새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지배에 항거하는 헝가리인을 감시하기 위하여 합스부르크가가가 구축해놓은 곳이다. 이후 나치 독일을 몰아낸 소련군이 모스크바 방향으로 이 자유의 여인상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1956년 반 소련 소요사태 이후 소련군은 이 요새에서 시가지를 향해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고 한다. 헝가리 땅에 세워진 요새인데, 모두 헝가리인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우리나라 역사도 만만치 않지만 이쯤되면 헝가리도 역사 한번 기구하네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리고 모든 곳을 감시하는 요새이다보니 이 치타델라 전망대(Citadella kilátó)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일품이다. 친구와 나는 일몰과 함께 부다페스트 시내에 불빛이 들어오며 반짝이는 것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눈으로도 가득 담고 싶고, 사진으로도 담고 싶은 그런 멋진 황혼의 야경이다. 그렇게 조금 보고 있자니, 뒤쪽에 한 무리의, 아니 여러 무리의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온다. 다들 어디에서 나타난 거야라며 궁금해했는데, 길 따라 조금 가보니 거대한 주차장이 있고, 거기에 대형 버스들이 주차되어 있다. 우리는 고생하며 오른 길을 버스로 야경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이다. 수능 족집게 강사한테 배우는 게 저런 기분일까.

    좀 더 어둑해지자 우리는 길을 내려왔는데, 다 내려와서 마약을 한 듯한 성도착증 미친놈들이 달려들어서 잠시 공포를 느꼈다. 이 언덕은 숲이 워낙 많아서 밤길에 조심해야 한다. 아름다운 경관을 본 후의 감동을 단번에 날려버리는 기분 나쁜 경험이다. 눈과 귀가 썩는 줄 알았다. 이때 우리는 발에 모터를 단 듯이 걸어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저녁을 먹을까 아니면 유람선을 탈까 고민했다. 그리고 쉽게 유람선으로 결정하였다.

    본격 굶주림 여행.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