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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드] <학려화정(鹤唳华亭)> 잡설
    오덕기(五德記)/中 2021. 10. 26. 13:07

     

    장가행을 다 본 후 학려화정을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완결 지었다. 무려 60편짜리 드라마. 아무리 스킵하면서 보더라도 이 정도면 현망진창.

    시대 배경은 남북조시대 남제(약 500년 CE)라고 하지만, 황제 성이 소씨인 것 빼고 실질적 시대배경은 명나라 냄새가 많이 나는 송나라(약 1000년). 대사에서 인용하는 역사 고사나 시문은 춘추전국, 양한과 동진시대가 대부분이라 적어도 실질적 배경으로 잡은 남제 이후의 이야기는 안 하려고 노력한다.   

    송대 특유의 강남 사대부의 고아한 분위기를 많이 풍긴다. 의상, 신발, 혁대, 신발 등의 복식이나, 다도, 서예 등의 문예에서도 송나라 내음이 짙게 난다. 특히 아래 사진에서 황제가 쓴 '정자건(程子巾)'은 송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정호, 정이가 유행시킨 모자이다(이 둘을 일컬어 정자라고 한다. 공자, 맹자 마냥). 드라마 상 여자 복식은 재미없지만, 남자 복식 보는 재미가 부족하지 않다. 다 필요 없고 광수의(넓은 소매 옷)가 다 했다. 시시때때로 옷을 갈아입어주는 패션리더 황제와 태자 옷의 고운 선이 꽤나 눈요깃거리.

    <학려화정>이라는 중드는 애초에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처음으로 열심히 보기 시작한 중드였기 때문이다. 다만 줄거리를 여쭤보면 다른 드라마와 섞어 이야기하셔서 나를 혼란에 빠뜨리기는 하였다. 마침 다른 친구도 <동궁>과 <학려화정>을 함께 권하여 잠시 <동궁>을 먼저 보기 시작했는데 살짝 촌빨 날리는 색감에 적응이 안 되어서 <학려화정>으로 급히 노선을 틀었다.

    처음에는 간이 안 좋아 보이는 입술 색을 가진 태자가 등장하여 별안간 고초를 겪는다. 1편은 사실상 별 내용이 없는데도, 밑도 끝도 없이 비장함과 긴장감 넘치는 음악에 끌려들어가 심히 몰입하여보았다. 1편을 이렇게 재미있게 본 드라마는 별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배경음악을 굉장히 적절하게 잘 사용하였다. 배우의 연기와 카메라 워크, 그리고 여기에 음악이 더해져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살짝 <마지막 황제>의 Rain이 생각나는 리듬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강약 조절을 매우 잘한다. 처절함을 극단까지 몰아붙인 후 여지없이 이완해주는 부분이 나온다. 상황은 비극이지만 그곳에 침잠하지만은 않는다. 태자는 어떻게든 안색과 성색을 밝게 하고 일상생활을 이어나가려 한다. 다행히 그에게는 봉은이라는 좋은 친구이자 사촌이 있다. 그와 있으면 분위기는 충분히 풀린다.

    인상 깊은 점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태자의 말투가 굉장히 다르다는 것이다. 방금 조당에서 황제나 문무백관 앞에서 사용한 언어와 평상시의 어투가 다르다. 우리말 번역 상으로는 호칭의 변화 정도를 빼고는 분간하기 어렵겠지만, 어전에서는 극히 문어체를 사용한다 치면, 평상시에는 퓨전사극 수준의 구어체를 쓴다. 이런 식의 간극이 재미있다. 드라마 상의 고어체는 배역을 맡은 배우에게도, 이 드라마를 시청하는 중국인에게도 어려운 정도이다(물론 내게는 더). 어디에서 띄어 말해야 할지, 어디에 강세를 주어야 할지, 심지어 이 대사는 무슨 뜻인지, 배우들도 독본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중국 열혈 시청자 중에는 이 드라마를 본 후 고문을 공부하고자 할 정도로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 고전문학도 조선시대 정철이 지은 가사만 봐도 다 한국어로 쓰여 있지만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가. 이런 식의 표현이 난무한다. 우리나라 사극에서 '통촉'이나 '망극'정도로 옛날 말을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감독 인터뷰를 보니 원작 작가가 중문과와 사학과를 전공했다고 한다. 

    드라마 자체는 초반 10편 정도까지 엄청 신나 하면서 달렸다. 후에 감독 인터뷰를 보니 원작자가 참여해서 각색을 했는데, 10여 편까지는 소설과 다르게 전개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초반에 보이는 긴장감과 만만치 않은 상대를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랑야방>에서는 정적들이 모지리라 매장소가 다 해낼 거라는 안도감이 있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상대도 만만치 않고, 게다가 황제도 그 안에 껴들어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점차 극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30편 정도에 이르렀을 때 보는 내 기력도 쇠하여 더 이상 보기가 힘들었다. 정쟁과 권모술수는 볼만 했는데, 여주인공이 입궁한 후 예의 궁중 암투 식으로 변질되자 급 피로감이 몰려왔다. 무슨 음식에 독을 탔네 마네 하면서 무고당하는 식의 내용 지겹지 않은가. 그래서 그때는 잠시 숨을 고르며 드라마 메이킹 필름(花絮)도 보고, 배우들 인터뷰도 봤다. 배우들은 저렇게 하하 웃다가 목도 조르고 고문하는 것 찍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드라마에 대한 몰입이 풀리고 안심이 된다. 그런데 무슨 유학자처럼 근엄한 라진 인터뷰를 보니 다시금 피로감이 몰려와 <진정령>과 <장가행> 배우들의 톡톡 튀는 인터뷰를 보며 기력 회복 완료. 다시 달렸다. 아주 많이 스킵하며. 전쟁 씬은 본 게 없다.

    이 드라마를 보기 전까지 라진이라는 배우를 몰랐는데, 이 사람 연기 보는 재미가 아주 대단했다. 나 연기 잘하지? 연기력 미쳤지? 하면서 연기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긴 한데, 이 정도도 연기를 잘하면 그래도 된다. 이 사람 연기를 보면서 <진정령>이나 <장가행> 정도에 만족했던 내 안목이 하늘 끝까지 치솟았다. 게다가 여타 드라마에서는 후시녹음으로 성우가 연기를 하였는데(혹은 본인이 녹음), 이 드라마는 정황상 동시녹음이라 배우의 목소리 연기가 빛을 발했다. 라진은 목소리가 건조해서 보통 저런 목소리는 대갈일성이 어려운데, 이 사람은 또 지를 때 엄청 잘 지른다. 라진 목소리로 연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던 드라마. 난 원래 성우가 정확한 발음으로 (그나마) 알아듣기 쉽게 연기해주는 것을 좋아하는데, 학려화정을 본 후 동시녹음을 일부러 찾게 되었다.

    아쉽게도 사람들이 다 비슷하게 생겨서(내가 안면인식 장애) 관모만 쓰면 못 알아봤다. 중서령 이백주 얼굴도 약 8편이 지나서야 알아봤고, 그 이후에도 새로운 신료가 나오면 또 중서령인 줄 알았다. 고봉은도 잘 못 알아봐서 오대왕이 나왔을 때 고봉은인줄 알 정도였다. 그래서 가뜩이나 두뇌싸움이 치열해서 내용파악이 어려운데, 사람 얼굴과 이름이나 직위를 구분 못하여 내용 이해에 어려움을 겪었다. 감독 인터뷰에 대만출신 배우인 구심지도 대사 처리가 훌륭해서 성우 안 쓰고 진행했다는 말을 보고, 내가 좋아하는 구심지가 나왔다고? 하고 찾아보니 육영이다. 헐. 수염만 붙여도 못 알아본다. 근데 이 드라마의 캐스팅 감독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너무 일변도이다. 육문석, 궁인 오씨, 선황후 고씨, 제왕비 이씨, 오대왕 등 약간 비슷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다시금 느끼지만, 비극적 드라마에서는 주인공 곁에 있으면 안 된다. 결국 죽는 사람은 옆 사람이기 때문이다. 비극은 살아남음에 찾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일을 꾸미면 꾸밀수록 악화일로. 차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이 정도까지 가지 않았을 일이건만 오히려 일을 꾸며 그르치게 된다. 

    외전을 보면 이해가 잘 간다고 하는데, 마지막 학려화정 본편의 마지막편이 너무 해괴해서 아직 보지 않고 있다. 잠시 쉬면서 <진정령>이나 <장가행> 배우들 인터뷰나 다시 봐야겠다. 실은 라진의 연기가 보고 싶어서 <막후지왕>과 <금수미앙>을 좀 보려 했는데, 영 적응이 안 되어서 못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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