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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22. 3. 14. 13:40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원제는 <무기가 되는 철학>

    읽으면서 줄곧 무기가 된 철학 없이도 적수공권으로 딱밤 한 대 세게 때려주고 싶었다(목적어 없음).

    그냥 자기 전에 가볍게 읽으려고 했는데 책 전체를 관통하는 아전인수와 이현령비현령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오류를 찾겠다고 덤벼드느라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예전에 제목에 끌려서 조금 보다가 너무나도 얼토당토 하지 않아서 이번 생에는 만날 일이 없겠거니 했는데, 최근 합류한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기로 결정한 것이다.

    호리유차 천지현격(毫釐有差天地懸隔)이라는 말이 있다. 털 끝의 차이로 하늘과 땅이 벌어진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든 생각이다. 철학자의 언설이나 사상을 약간만 다르게 해석해도 이미 원래와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작가도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다. 제38장, 소크라테스 파트에서 상대방의 언설을 한 두 마디로 정리하며 '결국 이런 뜻이죠?"라고 자신이 가진 지적 한계, 혹은 프레임에 가두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이 책 대부분이 이런 식의 '그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 건데 이것을 무기로 전환하자면 이래저래'라고 정리한다. 나는 이 무기 같지도 않은 무기를 보면서 이는 철학자에 대한 휼계이며 중상이라고 내적 외침을 지르느라 목이 쉴 것만 같았다. 깔때기를 꽂듯 개념을 왜곡하고 자신이 하고픈 어설픈 결론으로 여과시키고 부패시킨다.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에 대한 내용조차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마음이 복잡했던 연고는 이 와중에도 철학자의 언설에 대한 세간의 오해는 바로 잡고 넘어가서이다.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고 알기는 하는데 자신의 결론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소략하거나 곡해하기 일쑤라는 것이 죄라면 죄일 것이다. 그 와중에 비루한 논리 전개로 그 무기를 벼리지 못한 것들이 수두룩하니 대표적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가 그러했다. Devil's advocate의 케네디 대통령 얘기도 그렇게 길게 했어야 했나 싶었다. 게다가 예정조화와 비예정조화를 아무 데나 들이대는데 이것도 역시 일본 특유의 문화적 밈이랄까. 목적론과 기계론의 유의어로 쓴 것 같았는데, 좀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비예정조화라는 말을 라이프니츠가 알랑가 모르겠다.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휴리스틱을 들이댈 때, 마르크스의 인간 소외를 시스템과 규율의 문제로 치환해서 해석할 때 분노가 끓어 올랐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이도스를 혼재해서 사용하기도 하였고, 공정한 세상 가설 같은 경우는 이론에서 방점을 찍지 않은 부분에 집중하여 아웃라이어의 1만 시간의 법칙을 비난했다. 맬콤 글래드웰이 옳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를 비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음에도, 굳이 멜빈 러너가 주장한 것의 바깥 이야기를 제 식대로 해석하여 그를 비난한다. 그가 너무 자신 있게 공박해서 내가 잘못 이해한 건가 싶어 새벽 2시에 러너의 논문을 뒤질 정도였다. 이 작가의 가장 큰 문제는 각 개념이 가진 외연 너머의 것을 개념의 반대 의미로 해석하고, 개념의 단위를 제멋대로 전용하는 것에 있다.

    쫌쫌따리 중세시대에 철학 없었다고 무시하는 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나는 이런 중세 암흑기론을 보는 게 고역이다. 솔직히 로마야말로 (인상적인) 철학이 없었던 시대이며, 중세 시대야말로 신학과 법학이 꽃피던 시절 아닌가. 게다가 무기가 되는 철학에 왜 서양이 아닌 다른 세계의 철학은 없는가. 일본의 몇몇 잘난 철학가들을 기대했건만 그들 이름도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아서 서운했다. 앨런 케이는 그냥 인용문 하나로 우려먹은 것도 좀 웃겼다. 책 자체가 이런 인용문 우려먹기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다.

    모스코비치의 공정성과 불평등 문제는 흥미로웠다. 르상티망부터 시작해서 공정한 세계의 오류까지 이 작가는 공정성과 평등에 대해 나름 진득하게 사유하는 듯 싶었다. 다만, 본인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 결론이 사뭇 이분법에 사로잡힌 엘리트적일 때가 있다. 그리고 비록 들뢰즈의 편집증이나 분열증에 대한 해석과는 거리가 먼 아사다 아키라의 <도주론>의 개념이었지만 침몰하는 배에서 떠나라는 말은 꽤 마음에 들었다. 비일본적이라서 말이다. 

    번역은 잘 읽혔지만, 약간 의문이 가는 번역들이 있어 원본을 구하고자 하였다. 쟌넨나가라싯빠이시마시따. 소명을 천명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아마도 독일어 beruf를 가타가나로 쓴 것을 천명이라고 번역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조조를 평화로운 세상의 대도둑이라고 번역했는데 치세의 간적을 이렇게 번역한 것일까. 에포케를 판단정지라고 하였는데, 판단중지가 더 적확하다.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 万人の万人に対する闘争)을 만인의 만인에 의한 싸움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원본에 뭐라고 쓰여있는지 궁금했다. 세뇌를 중국어로 시나오라고 발음한다고 쓰고 굳이 약자로 洗脳라고 썼다. 간체자 쓰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이덴티티나 스키조프레니아 파라노이아는 원작이 다 가타카나로 써서 이렇게 번역한 것이겠지만 굳이 그랬어야 했나 싶다. 그리고 학자들 이름을 원음에 가깝게 옮겨서 잠깐 갸우뚱한 적도 있다. 이를테면 레온 페스팅거(리언 페스팅어), 기어트 호프스테드(헤이르트 호프스테더) 등이 그렇다. 호프스테드도 네덜란드 사람이니 헤이르트가 맞을 것 같긴 한데 미국에서 다들 기어트라고 했으니 말이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인데 패놉티콘에 대한 표기법을 이대로 해도 좋을까 싶었다(참 이 패놉티콘 개념도 작가는 너무나도 자기 구미에 맞게 곡해했다). 패놉티콘, 팬옵티콘, 파놉티콘 등 다양하게 표기가 되는데 나는 판옵티콘이라고 표기했으면 좋겠다. Pan+Opticon이라는 어원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표기법 아닌가. 같은 의미로 나는 한자어에 쓸데없이 쓰이는 사이시옷이 너무 싫다. 대푯값 같은 것. 

    책을 완독하면서 일본은 이런 거 참 좋아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지 인물로 배우는 처세술 어쩌고 하는 책들이 딱 이런 수준이다. 그런데 이런 책이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인기 있을 이유가 무에 있을까.

    예전에 중국-한국-일본의 관계에 대해 유교를 예로 든 촌평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자꾸 그 생각이 났다. 중국은 유교를 만들어냈고, 한국은 열심히 실천했으며, 일본은 그것을 팔았다. 선불교도 그렇지 않은가. 중국이 만들고, 한국은 열심히 실천하고, 일본은 zen으로 세계에 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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