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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철학 vs 실천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22. 3. 18. 16:59

     

    이 책은 마르크스의 몸에 녹슬듯이 엉겨 붙은 엥겔스와 레닌, 그리고 막시스트들을 떼어내 마르크스 철학의 실체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끈질긴 시도는 약 800페이지에 걸쳐 끊임없는 동어 반복이라는 연마제를 통해 진행되는데 얼추 다른 녹들이 다 제거되나 싶더니, 이번에 저자의 녹이 마르크스에게 들러붙는다. 그래도 무쇠 덩어리에게 이 정도 산화작용은 불가피한 일 아니겠는가. 결국 강신주의 눈으로 마르크스를 보겠다고 이 책 펴 들은 것 아니겠는가. 물론 이 책이 마르크스 철학을 논하는지도 모르고 읽기 시작한 눈 어두운 중생이 여기 있지만 말이다. 

    처음의 파리코뮌 얘기는 꽤 즐겁게 시작했다. 누군들 싫어하겠는가 혁명의 휘몰아침의 한가운데에 몸을 누이는 것. 그런데 중간부터는 점차 중언부언하여 때려치고 싶었다. 예전에 저자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는 아무리 어려운 철학 책이라도 초반만 독본을 잘하면 점차 읽을 필요가 없어진다고 했다. 이 책이 딱 그랬다. 그래도 눈 딱 감고 다 읽으니 뒤에서 알튀세르 나오면서 다시 재미있어지긴 했다. 다시 한번 묻건대, 책 이렇게 두껍고 말이 많았어야 했나.

    그 와중에 마르크스의 철학을 유물론의 체계에서 해감하여 실천적 사유로 전향한 작가의 노력은 책 전체를 관통하여 경주되었다. 또한 마르크스의 자기소외를 대상화와 자기 인정으로 설명하면서 굉장히 쉽게 풀어줬다. 자기가 만들고 싶은 것을 만들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고 그것에 대해 타인의 인정을 받는 것이 바로 자기 소외의 시작이라고 한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잘 설명해주는 개념이 아닐까 싶다.

    헤겔의 목적론에 대한 비판도 마음에 들었다. 이것도 사실 헤겔 철학에 대한 독단적인 프레임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의 목적론이 가진 한계, 즉 무언가 생기기만 하면 그것이 아무리 반인륜적이더라도 그것을 긍정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해석될 수 있음을 짚어낸다. 어떤 일이 발생하든지 그것이 역사의 목적이 실현된 것으로 여기는 사후적 정당화 사유체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우슈비츠, 광주항쟁 탄압은 헤겔에게 모두 과거 사건의 역사적 목적이 실현된 것이자,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맹아를 간직한 것으로 사유된다." 이토록 맹목적으로 현실을 절대화하는 사유이기에 마르크스는 (헤겔의) 목적론은 뒤에 오는 역사로부터 추상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다. 

    내가 혐오해 마지 않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록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이론을 통해 이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비판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국사 교과서를 볼 때마다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자본주의에 이르지 못하고, 그리하여 역사적 발전단계를 충분히 밟지 못했다는 열등감이 진하게 느껴지는 서술이 참으로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 책이 그런 지지부진함과 찝찝함을 많이 덜어내 준다. 

    그런데 해러웨이에 대해서도 꽤 분량을 안배하여 이야기하던데, 뒤에 참고 목록에는 해러웨이나 관련 저작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어찌보면 가장 현대적인 마르크스주의자는 (그녀에게 이견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해러웨이 같은데 말이다. 아니면 가라타니 고진?

    다만, 책의 과도한 감정 분출이나 느낌표를 보면서 이 독서는 아Q식 정신승리를 위함인가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나만 니체의 노예철학의 앙심이 생각났을까. 파리코뮌이 있고, 동학 집강소가 있다고 하지만, 과연 마르크스가 시도한 철학의 체화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의문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이 작가의 책은 어쩌다가 한번 먹으면 기분 전환되는 불닭 소스 닭갈비 같다. 작가 자체가 너무 독단적이라 (이 사람과 함께, 혹은 이 사람에 대항하여) 싸우자 마인드가 가능하다.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는 기분을 느끼면서 전투력 충만한 채로 읽을 책이 그리 많지는 않은데 이 책은 그렇다.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