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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23. 5. 8. 17:25

     

    나는 좀처럼 소설은 읽지 않고 한국 소설은 더욱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최근 한국 소설을 줄줄이 읽게 되었다. 즉 나의 의지에 반해서 읽게 된 책이라는 뜻이다.

    김연수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지연 <마음에 없는 소리>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최은영 <밝은 밤>

    2023.05.08 -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 [책] 김지연의 <마음에 없는 소리>,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최은영 <밝은 밤>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일전에 김연수가 쓴 <소설가의 일>이라는 책을 정말 재미있게 봤다. 블로그에 포스팅도 했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이 사람의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이 단편집이었다.

    2017.04.04 -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 [책] 소설가의 일


    꽤 좋게 읽었지만, 읽는 내내 마음은 복잡했다. 그가 소설 속에서 그려낸 철학이 충분히 정제되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의 꼴을 갖춘 채 내게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 좋은 소설이라면 철학이 잘 녹아들어서 그게 그건지 모른 채 흘러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같이 읽던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이 꽤 어려웠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쉬웠다. 이 사람이 품고 있는 철학의 꼴이 적나라하게 보여서 말이다.


    "오래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책에서 ‘그러나 당신은 실제로 눈을 보지는 않는다’라는 문장을 읽고 그 혜안에 놀라서 뒤로 넘어갈 뻔한 적이 있어요. 우리는 원하는 걸 다 볼 수 있지만, 그것을 보는 눈만은 볼 수가 없죠. 보이지 않는 그 눈이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않을지를 결정하지요. 그러니까 다 본다고는 하지만 사실 우리는 우리 눈의 한계를 보고 있는 셈이에요. 책을 편집하다 보면 글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책의 모든 문장은 저자의 생각이 뻗어나갈 수 있는 한계의 한쪽에서만 나오죠. 그래서 모든 책은 저자 자신이에요. 그러니 책 속의 문장이 바뀌려면 저자가 달라져야만 해요."
    -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그건 지민 씨의 엄마가 소설에 쓴 말이에요. 소설 속 연인은 두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시간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시간이 없으니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어요. 오직 이 순간의 현재만 존재하죠. 그럼에도 인간은 지나온 시간에만 의미를 두고 과거에서 현재의 원인을 찾습니다. 시간이 20세기에서 21세기로 흐르든, 19세기로 흐르든 마찬가지예요. 안타까운 건 이런 멋진 소설을 쓰고서도 지민 씨의 엄마가 이십 년 뒤의 지민 씨를 기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가장 괴로운 순간에 대학생이 된 딸을 기억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선택은 달라졌을 겁니다.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그러니 지금 미래를 기억해, 엄마를 불행에 빠뜨린 아버지와 그 가족들을 용서하길 바랍니다.” 
    - <이토록 평범한 미래>,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한때 합리적인 추론 결과 자살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을 때, 자살과는 상관 없는 그냥 나의 평범한 미래를 생각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은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식의 버티기와 시간이 다 해결해 준다는 논리와는 전혀 다른 시간의 현재와 미래를 바꾸고 원인과 결과를 바꾸는 실험이었는데 놀랍게도 현재의 고통을 가장 경감해 줬다. 그 이후 가끔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유언을 듣다 보면, 그냥 그 순간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평범한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아예 새롭게 흘러가는 시간이랄까.

    나는 우울함에 침식된 사람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은 결국 견디라는 얘기밖에 안 된다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예 상관없는 미래를 생각하게 하고 그때 지금의 상태를 생각하고나 아예 관련 없는 과거를 생각해보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 뇌에서 스피커가 호동하며 생기는 거대한 소음을 없애기만 하면 되니깐 말이다. 물론 자살로 귀결되는 것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울증의 결과라면 그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의 사고 실험은 가능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마치 사점만 넘으면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세컨드 윈드처럼 말이다.

    두 번째 단편인 <난주의 바다앞에서>를 보면서 '황사영 백서사건'을 다룬 거구나 했다. 이것이 뭔고 하니 박해받는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신앙의 자유를 허락받기 위해 이 땅에 외세가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내용으로 청나라에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약 10년 전 한국사를 일독하던 시절 이 황사영 백서사건을 보면서 이미 대놓고 아나키스트였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에 대한 거스름이 도를 넘어선다며 분기탱천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최근 이 이야기를 반추하면서, 국가보다 종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면, 혹은 정체성을 이쪽으로 결정한 사람이라면 당연한 선택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마침 이 소설에 그려진 이야기를 보면서 또다시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래 이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고.

    “글쎄. 난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생각해. 지금 슬퍼서 우는 사람에게도. 우리는 모든 걸 이야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이야기 덕분에 만물은 끝없이 진화하고 있어. 하지만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바로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그건 그 책을 읽기 전부터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였어.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기도 하고, 지금도 책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분들은 왜 그렇게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할까? 나는 왜 같은 이야기를 읽고 또 읽을까? 그러다가 문득 알게 된 거야, 그 이유를.” 
    -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이 노래 가사가 마음에 들었고

    今日もほほえみが 私を過ぎた。
    何も 何もなかったように 。
    私の心ははりさけそうだ。
    人を愛せないゆえに。
    明日よ 自由を 自由をおくれ 。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이토록 평범한 미래» 중에서

    <사랑의 단상 2014>를 보면서 세월호 얘기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급기야 눈물을 쏟으면서도 소설에 이런 거 쓰는 건 반칙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속 바르바라 성녀 얘기를 보고 쿠트나호라에 있는 바르바르 성당의 성당 벽화가 생각났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은 박혜진 문학평론가가 작가와의 만남에 대해 쓴 글이었다. 

    "그럼에도 그날을 또렷이 기억하는 건 대학교 특강에 초청받은 스타 작가가 보여준 예외적인 모습 때문이었다. 그는 그 시간을 위해 따로 써온 글을 읽어 내려갔는데,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와 같은 장면은 본 적이 없다.
     - <해설: 바람이 불어온다는 말>, «이토록 평범한 미래»

    박혜진 씨가 글을 잘 쓴 것도 있지만,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특강에 초대되어서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글을 쓰는 글쟁이는 도대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가하는 김연수 씨에 대한 경이로움과 뭉클함이 한데 어우러진 감정이랄까. 


    책을 읽는 내내 바람을 마주하거나, 때로는 바람에 올라탄 듯한 느낌이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폴 발레리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