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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찰
    사람 사는 느낌으로다가/의미 2018. 7. 17. 13:59
    지하철에 탄 학생들 교복에 명찰이 부착되어 있다. 떼었다 붙였다 하는 것도 아니고 오버로크로 박아버린 경우이다. 시력이 안 좋은 편이라 보통이라면 눈에 보일 리가 없는데 유독 한 학생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야구 잘 할 이름이네. 혼자 피식하다가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쉽게 이름을 알아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혹여 억하심정을 가진 자의 데쓰노트에 그 이름이 새겨지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 일 아닌가. 

    고래로 동양 문화권에는 이름에 대한 터부가 있었다. 훗날 연구하고싶은 주제가 바로 '이름'에 관한 비교문화 접근이다. 동양에는 '피휘', 즉 왕, 성인, 조상의 이름을 기를 쓰고 피해 쓰는데, 서양에는 오히려 성인과 선대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 모두 존경의 뜻에서 나왔건만 양태는 극도로 다르다. 얼마나 재미있는 주제겠는가. 중동은 또 다르고, 문화권 별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라틴아메리카에는 예수라는 이름은 물론, 아도나이, 엘로힘과 같은 유일신의 히브리어 명칭을 이름으로 가진 사람이 많지만 영어권에서는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피 정도가 아니라 신성모독을 운운할 지도 모른다.

    비단 피휘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는 이름을 극도로 숨긴다. 그래서 어려서는 아명이 있고, 성인이 되면 자가 있고, 스스로는 호를 지어 부르며, 죽어서는 시호가 추증된다. 지금도 부모의 함자를 말할 때에는 외람되게 이름을 가로지 않고, 무슨 자, 무슨 자 하며 쪼개지 않는가. 자신의 이름으로 1인칭을 말하는 것은 겸양의 표현이다. 강호동이 입버릇처럼 '호동이가 그랬어요' 라고 하는 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자의식 과잉의 표출이지만, 옛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시청자에게 본인을 굉장히 낮추어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명찰은 강제적 겸양이다. 학생, 군인, 제복을 입은 자는 어쩔 수 없이 겸양을 실천해야 한다. 명찰을 떼고 싶을 것이다. 나도 학창시절에 명찰을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다 등굣길에만 꺼내고 통과하였으니 말이다. 지금도 이름으로 불리는게 싫어서 업무상으로는 영어 이름을 쓴다. 나름의 호인 것이다. 내가 이름을 알리지 못해 안달인 정치인이나 연예인도 아니고, 강제로 겸양하고 싶지 않다. 지하철에 탄 학생들도 그렇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탈부착이 가능한 명찰도 아니고 아예 옷에 박아놓은 명찰은 좀 그렇다.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저주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내용을 쓰다보니까 예전에 쓰다 만 유물과도 같은 글이 있어서 발굴한다. 한창 <나츠메 우인장> 보던 시절에 쁼 받아서 쓴 글이다. 원래 제목은 <나츠메 우인장, 이름, 그리고 시 한 수>로, 2010/10/18 - [眼耳鼻舌身意/色_만화_애니] - 나츠메 우인장, 소통, 그리고 시 두 수와 연계하여 쓴 글이다. 


    <나츠메 우인장, 이름, 그리고 시 한 수>
    >>나츠메 우인장(夏目友人帳), 처음 들었을 때에는 무슨 장급 여관을 지칭하는 듯한 이 제목은 사실 나츠메 레이코 오바상이 모아놓은 요괴들 이름이 달려있는 장부다. 굳이 '우인', 즉 친구라는 말로 그들을 지칭하면서. 

    처음에는 별 생각없이 보다가, 이름에 집착하는, 그러니까 이름을 돌려받기를 원하고, 이름을 가지고 싶어하고, 이름을 돌려 받거나 명명 받을 때 환희에 찬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부하지만 학창 시절에 배운 시가 떠올랐다.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의 소묘(素描), 백자사, 1959>


    세상에 물질은 많고 많지만, 이름을 지어 다른 것과 구별함으로써 나와 관계 맺기 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니, 존재/비존재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명명을 하니 대상물 뿐만 아니라, 주체에도 의미가 부여된다. 그리고 의미를 향한 이런 욕구는 외계의 대상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그대로 돌아온다. 

    우인장에는 요괴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불렸을 때 요괴는 크게 감응한다. 심지어 구원/해탈하는 듯 하다. 이름을 적음으로써 주박에 걸리고, 이름을 부름으로써 의미를 가지고, 이름이 생기면서 외로움으로부터 탈리하는 듯한 그 모습은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와 함께 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의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저주, 즉 '이름'이 생각나게 한다.

    오카노 레이코의 <음양사>를 보면 음양사인 아베노 세이메이가 귀신을 퇴치하러가면서 친구 히로마사에게 주의 사항을 일러준다. 이름을 절대 귀신에게 알려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연유를 묻자 세이메이는 "이름은 저주"라고 대답한다. 저주란 사물을 속박하는 것인데 이름은 사물의 근본적인 실체를 속박하기 때문이란다.

    세이메이: "히로마사...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저주란 뭘까." 
    히로마사: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저주? 그걸 왜 나한테 묻나? 자네가 가르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세이메이: "아까 말했잖나. '이름' 말이네." 
    히로마사: "자네의 세이메이, 나의 히로마사라는 이름?" 
    세이메이: "그래. 산이나 바다, 나무나 풀 그런 이름들도 저주의 하나네. 저주란 곧 존재를 속박하는 거야. 사물의 근본적인 실체를 속박하는 게 바로 이름이지. 이를테면 자네는 히로마사라는 저주를, 나는 세이메이라는 저주를 받고 있는 사람이란 소리일세.  이 세상에 이름 없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네.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할 수 있지." 
    히로마사: "어렵군. 내게 이름이 없다면 나란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단 말인가?" 
    세이메이: "아니, 자네는 있어. 히로마사가 없어질 뿐이지."  
    히로마사: "하지만 히로마사는 나야. 히로마사가 없어지면 나도 없어지는 거 아닌가?" 
    세이메이: "........... 눈에 안 보이는 존재조차 이름이라는 저주로 속박할 수가 있지. 남자가 여자를 사모하고, 여자가 남자를 사모하는 그 마음에 이름을 붙여서 속박하면, 사랑이 되지." 
    히로마사: "오호라, 하지만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겠지." 
    세이메이: "당연하지. 그것과 이건 별개의 것이네." 
    히로마사: "더더욱 모르겠군." 

    -만화 음양사 1권 중에서-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