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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연] 베를린필 12첼리스트(6월 27일) 롯데콘서트홀_잡상
    오덕기(五德記)/음악_공연 2018. 7. 4. 10:59

    그러니까 2000년. 처음 TV를 통해 그들의 연주를 듣고 언젠가는 직접 듣고말겠다고 결심했다. 이후에도 몇 차례 내한하였지만 게을러서 놓치거나, 내가 외국에 있거나 하며 인연이 닿지 않아 레이더망에 걸린 이번 공연만 오매불망 기다렸다. 

    소리만 잘 들으면 되니까, 라는 생각으로 가장 저렴한 표를 사려고했으나 시야가 가린다고 해서 답답할까봐 그 다음으로 저렴한 합창석 표 획득.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R석은 자리가 많고, 저렴한 자리는 매진이다. 일본에 있는 친구 말로는 그곳 공연 객석표도 같은 양상이라고 한다. 

    장소가 롯데콘서트홀이라 저녁으로 멘야하나비에서 나고야마제소바를 먹을 요량이었다. 허나 점심을 너무 배불리 먹었는지 배 안이 맛있는 음식을 영접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하여 집에 들려 간단히 저녁을 먹고 7시에 출발. 약간 길이 막혀서 종합운동장역에서 전철로 갈아타면서 지도를 봤다가 기겁. 지금까지 위치를 샤롯데씨어터로 착각하고 있던 것이었다! 워낙 두문불출하는 성향 덕분에 롯데월드타워는 가본 적도 없고, 롯데콘서트홀은 생긴지도 몰랐다. 초행길에 시간이 촉박한 것만 같아 마냥 불안해지기 시작했다(라고는 말하지만 나름 5년간 그곳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그 지역 주민). 

    일단 롯데월드타워에 들어서서 콘서트홀이라는 화살표만 보며 부지런히 따라가는데 한도 끝도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2층 정도에 다다라서야 블로그 검색의 결과 콘서트홀이 8층에 위치하였음을 알게 됨. 정신이 아득하다. 에스컬레이터도 불규칙적으로 놓여 있어서 한눈에 안 들어오는데 이렇게 하염없이 상승길이라니. 아니 무슨 공연 시설이 8층에 있단 말인가. 그래도 처음 들어와 본 롯데월드타워 내부는 꽤 아름답다. 이 건축 궁금하네하며 무려 공연 시작 20분 전에 여유롭게 공연장 입장.

    표를 받아들고 무대 뒷편으로 갔다. 어셔들이 놀라울 정도로 친절하다. 자리를 안내하기 위하여 기꺼이 계단을 함께 밟아준다. 이런 어셔느님들은 처음이다. 자리에 앉으니 공연장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까지 많은 공연장을 가보았지만 이곳의 인테리어나 규모도 뒤쳐지지 않는다. 공연을 보면서 느낀 건데, 다른 공연장에서의 경험으로 비추어보아 노란색으로 체크한 객석이 소리 블렌딩이나 음량이 가장 적절할 것 같고, 보라색으로 체크한 곳에서는 소리가 몽글몽글하게 맺혀서 제일 예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또 올 경우를 대비해서 좌석 체크. 


    나는 프로그램지를 구입하지도, 레퍼토리도 모른 채 자리에 앉아 있었다. 편견없이 듣겠다는 그런 마음. 야구장 갈 때도 라인업을 안 보는 그런 마음.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해주면 한량없이 기쁘겠다는 그런 마음. 혹여 Man with a Harmonica를 연주해주면 정말 고맙겠다는 그런 마음.

    <Man with a Harmonica>


    드디어 연주자들이 입장하고 첫 곡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경우에 그렇지만 공연 시작할 때 울려퍼지는 음악 소리는 일상생활에서 쉽게 듣지 못하는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운 소리라 나도 모르게 울컥하게 된다. 눈물을 훔치고 있자니 반대편 객석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보인다. 

    그런데 첫 곡이 끝나자 지각한 관객들을 입장시킨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착석하는 소리에 나도 정신이 산란했는데 연주자들도 집중력이 흐트러졌나보다. 두 번째 곡인 파반느, 이 가슴 저미도록 아름다운 노래에서 약간의 잡음이 흘러나오기도 하였다. 1부의 마지막은 신나는 <카라반>으로 마무리. 역시 1부의 마지막은 이렇게 불태워야 한다.

    <Caravan>

     

    12명의 첼리스트에게 특화된 곡이자, 아마도 가장 다양한 주법을 사용하는 듯한 <보사노바 속 12인>이라는 곡은 관객의 웃음 소리까지 음악으로 녹아든다. 다양한 실황 영상을 봤는데 매번 똑같은 박자에서 똑같은 음량과 길이로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데 마치 음악의 한 부분 같다. 

    <The 12 in Bossa Nova>



    조르지 벤의 <Mas Que Nada>는 종장에서 소리가 아주 작게 가다가 0이 되는 순간을 체현한 곡이다. 순간 공연장 전체가 숨막힐 듯 조용해지는데 예전에 매머드 동굴에 들어가서 모든 불을 소등했을 때의 기분이다. 이 정도면 존 케이지도 만족할 사운드스케이프이다. 

    앙코르에서는 혹시나 <Man with a Harmonica>를 해줄까 기대했지만 뭐 가뿐하게 핑크팬더. 나름 한국 VS 독일 월드컵 경기가 있는 날이라고 각 국대 유니폼을 입고 등장하는 깜찍함도 선보였다(그리고 사이좋게 탈락했다나 뭐라나). 

    접근성이 좀 떨어진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만족스러운 공연장. 대단한 어셔느님들. 감동의 공연. 벌써 다음 공연을 예매하였다. 12인의 첼리스트, 다음에 또 만납시다.



    뻘소리 1: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첼로 소리의 향연을 듣자니 옛날 얘기가 하나 떠올랐다. 탈무드였나. 재산을 물려줄 자식을 고르기 위하여 동전 한 푼 주고 커다란 방을 채우라고하자 가장 지혜로운 아들(이런 얘기에서는 언제나 막내 아들)이 촛불 빛으로 방을 가득 채웠다는 뭐 그렇고 그런 얘기. 어쩌면 양초를 살 돈 한 푼 없어도 소리만으로도 이렇게 풍성하게 공간을 채울 수 있겠구나하는 뻘소리 지껄여본다. 

    뻘소리 2: 공연장의 음향을 듣자하니 지금 내가 듣는 소리를 다시 이 공간에서 동일 연주자의 연주로 들었을 때 소리가 완벽하게 일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하는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연주자의 컨디션, 악기와 활대의 상태, 습도와 온도, 대기 상의 먼지 분포, 청중의 상태, 청중이 입고 있는 옷, 브로치, 콧수염, 머리털, 숨결. 중중무진한 복잡계가 펼쳐진다. 라플라스의 악마도 알지 못할 그런 얘기. 그럼에도 확률상 이들 연주자라면 대충은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내리라. 이래서 통계가 중요하겠구나. 나는 세이버메트릭스 만능론에 거부감이 심하다. 세이버메트릭스의 수많은 가중치와 지표 계산식을 보다보면 "숫자를 고문하라, 그러면 무엇이든 얘기해줄 것이다"라는 인용이 떠오른다. 즉, 내가 좋아하는 선수의 우수성을 설명하려면 어떻게든 숫자를 가공해서 줄세우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예 가당치 않은 경우가 있지 않겠는가. 선수가 어느 정도 수준은 되어야 숫자도 고문하지. 12인의 첼리스트 공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가당치 않음을 완벽하게 제외한 90% 이상의 성공 확률을 보장할 것이다. 그러니 명불허전이다.

    뻘소리 3: <Mas Que Nada> 마지막의 완벽한 적막을 듣자하니 청중에게 생각이 미쳤다. 어쩌다가 타펠무지크, 즉 귀족들 식사 중에 배경음악 정도였을 이런 현악기 구성을 오로지 음악만 듣기 위하여 적지 않은 돈을 치르고, 게다가 정중한 자세로 경청하게 되었을까. 이런 식의 연주자와 청중의 관계 역전은 언제, 어떤 맥락을 가지고 이루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사실 실내악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오랜 의문이었다). 그래서 빌린 책이 <청중의 탄생>. 언젠가는 읽겠지.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