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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란 머리의 아이
    가르치는 중/가르치니까 2009. 2. 6. 05:56
    이걸로 세 학기 째 강의. 수업에 대한 압박에는 익숙해질만도 한데,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영어 때문에 아이들이 날 싫어하지는 않을까 나도 모르게 위축되곤 한다. 첫번째 학기는 최고로 어리버리했지만, 계절학기의 특성이랄까, 아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고, 여름방학에도 열외의 돈을 내서라도 학점을 따겠다는 공부에 대한 열의가 있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아이들 이름 다 외우고, 숙제 안 내면 내라고 보채기까지 하는 둥, 애들 하나하나에게 관심을 보였고, 자유롭게 방임하는 미국적 풍토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내가 이렇게 챙기자 오히려 고마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덕분에 강의평가란에도 재밌었다고, 많이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자신감 가지라는, 그거 하나면 된다고 응원하는 글들이 많아서 뭐랄까 약간 부끄럽기도 하면서 약간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었다.  두번째 학기는 내 스스로도 갑자기 늘어난 학생들 때문에 부담스러웠고, 아이들 이름과 얼굴을 다 외우지도 못했고, 처음 했던 강의 그대로 쓰면 된다는 식의 안일함 때문인지 나는 그들에게, 그리고 그들도 내게 데면데면했다. 몇몇 친근하게 다가오는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그저 사무적인 강의를 했다. 그닥 재미없었던 기억...

    이번 학기 역시 그냥 주어진 강의만 하자는 생각에 애들 이름 얼굴 외우기도 귀찮아 하면서 둘째주까지 보냈다. 아이들 분위기는 첫학기도, 두번째 학기도 어쩌면 이렇게 학기마다 다른가 모르겠다만, 이번 학기는 특히나 수업 시간에 반응 오는게 다르다. 학생들 스스로가 수업에 좀 더 참여하는 분위기랄까. 수업 끝나고 남아서 내게 물어보는 애들도 훨씬 많고. (거의 열 명씩 줄을 서 있곤 해서, 걔네들이 원하는 거 이것 저것 해주다 보면 수업시간보다 더욱 땀을 흘리곤 한다 -_-) 내가 뭔가 물으면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지껄여 대고, 내가 이해했냐고 물어보면 수업 도중에도 엄지손가락을 세우곤 한다. 이번 강의는 머스마들이 좀 더 많아서 그런지 분위기가 좀 더 활달하고 유치하다.(쿨럭) 내가 제일 감동했던 것은, 어떤 애가 내놓은 리액션 페이퍼. (이거 한국말로 뭐지? 감상문?) 수업 시간 도중에 틀어준 이집트 피라미드 다큐멘터리를 보고 어떤 여자애가 감상문이라고 써냈는데, 10분도 안 되는 비디오클립을 보고 썼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의 풍부한 감상과 통찰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왠지 이런 아이를 실망시키는 수업을 해서는 안 되겠다는 일말의 각오 같은 것이 들더라.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머리를 파랗게 염색한 아이. 머리는 파랗게 염색하고, 얼굴에는 여기저기 피어싱을, 그리고 스모키 화장까지 하고 나타나면 아무리 미국에 와서 볼 것 못 볼 것 다 겪어본 사람이라도 흠칫 놀라곤 한다. 출석을 부르다가 그런 얼굴을 한 아이가 우리 반에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아담하고 귀여운 데다가 잘도 웃어준다. 그런 얼굴을 하고 수업은 또 얼마나 진지하게 듣는지, 한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라 흥미진진하다.

    강의 2주일만에 새로산 넷북을 들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화면을 켰다. 교탁위의 스크린 두 곳에 노트북이 연결되면서 화면이 뜨고, 전면 스크린에 화면이 뜨는 순간 앗차 했다. 내가 넷북을 사자마자 들뜬 마음에 만화 카우보이 비밥의 에드라는 녀석을 바탕화면으로 삼은 것이다. (아래의 그림) 화면이 뜨자마자 파란 머리의 아이가 갑자기 "에드다!"이런다. ㅋㅋ 내가 너 얘 아냐고 물으니,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한다. 나도 에드 너무 좋다고 선생이 체통없이 강의시간에 만화 그림 띄워놓고 싱글벙글 했다. 그 아이도 싱글벙글. 미국에 와서 일본 만화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데, 이런 거에서 공통점이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참으로 즐겁다. 서로 웃으면서 마주보던 기분이 묘하게 따뜻해서, 에드가 안은 개새끼(이름이 있었는데 -_-;)의 체온이 전해지는 것 같아서, 염화미소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 좀 더 좋은 강의를 해서 사랑받는 선생이 되고 싶다. 캬캬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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