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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뷰] 정령의 수호자 (2)
    오덕기(五德記)/日 2010. 4. 30. 22:43
    ※ WARNING: Thar Be Spoilers Ahead! 
    [리뷰]'정령의 수호자' (Moribito: Guardian of the Spirit/精霊の守り人) (1) 에서 이어지는 리뷰입니다. 다량의 네타가 있습니다. 스포를 원하시지 않는 분은 앞의 글을 봐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가 죽더라도 분명 뭔가를 남길 수 있으니 괜찮아.  
                                                                                      -23화, 챠그무의 대사 중



    일전에 정령의 수호자에 대해 쓴 글에서 이 작품이 기본으로 깔고 있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철학의 문제가 단지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던진 화두였다면, 이 애니메이션이 작품 전체를 관통해서 다루고 있는 핵심 주제는 바로 '전승'입니다. 이전 세대의 유산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시 다음 세대로 전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찬찬하고 은근하게 묘사하고 있죠. 그리고 이 묘사는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매개로 구체적으로 그려집니다.

    바르사는 초반에 왕이 보낸 자객으로부터 챠그무를 구하려다가 배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 구조를 기다리는데 그때 너무나 생생한 지그로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바로 어린 바르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들을 눈물을 흘리며 죽여야 했던 지그로의 모습인 거죠. 챠그무를 구하려다가 얻게 된 복부의 깊은 상처는 '사람을 구하는 일은 자신의 목숨을 갉아먹는 행위'라는 지그로의 말이 가지는 책임감의 무게와 함께 챠그무가 큰 상처를 딛고 얻게된 아이임을 상징합니다. 흔히들 아이를 입양한 부모가,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아니고, 가슴 아파 낳은 아이라고 말하듯이요. 


    영혼의 상처를 받아가며 낳은 아이 바르사, 배에 깊은 상처를 입어가며 목숨을 걸고 낳은 아이 챠그무. 
    부상으로 쓰러진 바르사 옆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지그로의 환상. 지그로에게 죽임을 당한 친구의 '네게도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구나'라는 마지막 말. 그리고 바르사에게 이어지는 운명의 고리. 
    바르사에게 덧씌워지고 있는 지그로의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바르사에게 투영되는 지그로의 모습은 작품 여기저기에서 나옵니다.
    바르사는 지그로를 닮아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무뚝뚝한 여인 입니다만 문득문득 자신이 거둔 아이에 대해 속 깊은 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챠그무의 손이 텄을 때 약을 발라주는 바르사의 상냥한 표정에서, 훈련에 지친 챠그무가 잠이 든 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는 바르사에게서 그녀 스스로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우리도 지그로를 보게 됩니다. 

    물론 아이의 뺨을 때리는 모습도 그렇고요. 특히 자신을 베고서라도 궁으로 돌아가려는 챠그무의 뺨을 때릴  때 '부모에게 칼을 들이대는 자식이 어디있냐'는 바르사의 일갈은 그녀의 부모라는 정체성을 매우 효율적으로 그리고 두려울 정도로 거칠게 표현한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분노에 가득찬 그녀의 목소리에 전율하면서 마음 한 켠으로 뭉클했던 기억이 나네요.

     
    알을 낳을 때 몸이 갈가리 찢겨 죽을 거라는 운명을 알고 괴로워 하는 챠그무에게 바르사가 해주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시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그리고 다시 그 자식에게서 그의 자식으로 라는 전승의 의미를, 그리고 그 전승을 어떻게 체화하는지를 되새기게 됩니다.

    "지그로는 비록 한 푼도 되지 않는 일이라 해도 그게 가능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그 일을 하지 않으려는 건 죄라고 생각한게 아닐까. 지그로에게 있어 나라의 영웅으로 있는 것도 이름 없는 한 인간을 지키는 일도 같았던 거야. 게다가 가능하면 추격자의 목숨마저 구하려고 했지. 난 이제야 마침내 그걸 알게 됐어. 네 호위를 받아들임으로써 말이야.(22편, 바르사의 대사 중)" 

    우리나라에 '자식 낳아 봐야 부모 마음 안다'는 속담이 있듯이 바르사는 챠그무를 거둠으로써 자신을 자식으로 거두어들였던 지그로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게 됩니다. 무엇인가가를 지켜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지키는 행위의 소중함, 그리고 자신이 지켜야 하는 목숨만큼 귀중한 다른 사람의 목숨에 대한 인식이 그것이죠. 글 맨 처음에서 인용하였듯이 챠그무도 자신이 죽어도 남길 무엇인가가 있으니 괜찮다라는 생각을 지그로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게 되는 거고요. 바로 전승이 체화되는 순간인 거죠.

    보는 내내 마음이 쓰였던 캐릭터 - 지그로.

    이렇게 윗세대의 마음은, 사랑은, 그리고 문화는 아랫 세대로 전해집니다.  지그로의 마음은 지그로에게서 바르사에게로, 바르사에게서 챠그무로, 그리고 챠그무에게서 알에게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이 작품 속 부모의 마음이라는 코드를 읽을 때마다 뭉클한 감동을 느끼는 까닭은 저 또한 그 마음을 고스란히 받은 자식이기 때문이겠죠. 
    오프닝에서 바르사에게서 알을 받는 챠그무도 전승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요. 

    비단 부모에게서 전달되는 후손에 대한 내리사랑 뿐만이 아닙니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다루고 있는 '전승'이라는 주제는 가끔은 온전하게 다음세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유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도 표현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토오미 마을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알의 비밀을 풀기 위해서 바르사 등은 토오미라는 야쿠의 전통이 잘 보존되고 있는 마을에 갑니다. 그러나 정작 도착해보니 알의 비밀을 설명해줘야 할 '이야기 꾼'이라는 전통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이야기를 암송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겪어야 하는 이야기 꾼의 전통을 없앤 족장의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담보되어야 할 희생이 두려워 버려지는 소중한 전통에 대한 토로가이의 노여운 심정도 공감이 가더라고요. 

    지켜지지 않는 전통이라던가 문화유산에 대한 개탄은 비밀서고에 있는 해석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던 초대 성도사의 비문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천문학자인 슈가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날조된 역사를 숨기기 위해 처박혀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이런 중요한 자료를 살피지 않는 학자들의 게으름과 왜곡된 지식에 대해 분노하고 탄식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유실되어가는 전통 혹은 문화유산이 하나는 구술역사(oral history) 다른 하나는 기술(記述)역사라는 거죠. (전 이 장면을 보고 원작의 작가가 혹시 역사 공부를 한 사람인가 했었는데 알고보니 문화인류학자더라고요.) 이렇게 한 분야의 양 면을 두루두루 다루는 이야기는 애니메이션 곳곳에 산재하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할게요.

    지금까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중심 주제에 대해서 끄적여봤어요. 생각이 정리가 잘 안 되어서 그런지 글이 길어지네요. 물론 사람마다 생각하는 작품의 주제는 다를거라고 생각해요. 명확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애니메이션은 아니니깐요. 위에 말한 이야기도 단지 제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주제라는 점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좀 길고 지루한 이야기가 되었네요. 다음에는 이 애니메이션 전반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할게요. 
    오랜만에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다보니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네요.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