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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드] <진정령 陈情令> 잡설
    오덕기(五德記)/中 2021. 9. 30. 10:14

     

    나같이 한번 시작하면 달려야 하는 사람에게 중드는 위협적이다. 수면을, 올곧은 자세를, 시간을, 정신을, 건강을, 그리하여 인생을 갉아먹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바로 중드이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제어가 잘 되는 것 같기도. 그리하여 50편을 엿새 만에 봤다(이 정도면 제어가 된 것이다). 



    누군가가 추천하긴 했는데 BL 소설 기반이라 그래서 딱히 당기지 않았다. 하긴 내가 최고의 중드라고 칭송하는 랑야방도 소설의 초반부는 BL이었고 나중에 이 부분은 다 걷어냈다고 한다. 드라마화하면서 각색만 잘하면 본디 발 담그고 있던 장르가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해당 작품의 왓챠 리뷰에 있는 수많은 부녀자(腐女子)의 한 줄 평을 보면서 약간 겁먹긴 했다. 

    초반 음호부를 탐하는 모습이나 전반적인 장렬함이 반지의 제왕 도입부를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원래 무협물이나 판타지물이 약간 비기나 비급을 좇는 경우가 많아서 이런 식으로 연출되기 십상이라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클리셰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다만 이상했던 것은 16년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회상신이 시작되고 여기에서 위무선이 죽는다. 이 장면이 종결된 이후에 지금 이야기를 다루면서는 16년 후라는 자막이 뜨고 위무선이 부활한다. 도대체 시간의 기준이 궁금해졌다. 원래 16년 전으로 시작했으면 이번에 다룰 내용은 현재라고 표기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기준점이 모호해지고 고전역학의 시간관념이 어그러지는 안이한 자막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더한 것이 나온다. 다시 16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내용은 위무선이 죽는 시점보다 한참 전의 이야기를 다룬다. 내용상 계산해보니 적어도 2~3년은 걸리는 이야기이다.  이 사이에 무림 종주 정권이 바뀌고, 위무선은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사저는 결혼해서 애까지 낳는다, 그런데 16년 전이라고 한다. 부족해도 19년 전이라고 써야 했었다. 왜 이렇게 안이한 자막을 달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처음 남잠이 등장했을 때에는 얼굴이 길어 보여서 흠칫 놀랐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얼굴 폭이 좁은 것이지 얼굴이 긴 것은 아닌 듯싶다. 두 눈의 눈동자가 대칭이 아니고 약간씩 어긋나는데 (오른쪽 눈동자가 조금씩 쏠려있거나, 더 늦게 초점을 맞춘다거나) 더 시선을 끌어 매력적이었다. 남잠 is 뭔들. 이 역할은 사람이 어찌 생겼건, 연기를 발로 하건 세인의 사랑을 받는 역할이다. 누가 백의를 표표히 날리고, 심지가 굳은 무공 최강 냉미남을 거부하겠는가. 

    주인공인 위영은 처음에는 너무 사고를 치고, 제멋대로에, 경박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다지 정이 안 들었는데 꽤 좋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 출연 배우들이 다들 연기를 곧잘 하긴 한다. 솔직히 눈에 익은 배우가 한 명도 없었고, 듣자 하니 신인을 많이 등용하였다고 하는데 연기에 어색함이 없다. 장르 특성상 눈을 크게 뜨고 놀라거나 화내는 장면이 많아야 하는데 그런 역할을 하기에 특화된 커다란 눈들을 장착하고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미형이고 키도 고르게 크다.

    서사 자체는 촘촘하지 않았다. 거대한 줄기는 흥미롭게 진행되는데 일단 대화가 치밀하지 않고 서로 겉돈다. 누군가가 북을 치고 있으면 상대는 장구를 쳐야 하는데 별안간 휘파람을 분다. 나는 왜 대화가 저렇게 진행되는 걸까. 지금 자기들끼리는 말이 통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의심을 품었다. 대화가 논리적으로 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을 때는 입씨름을 하다가 상대에게 결국  "입 닥쳐"라고 말할 때일 정도이다.   

    개연성 측면에서도 허술할 때가 많다. 갑자기 금광요, 남희신, 섭명결이 의형제를 맺는다. 섭명결이 계속 금광요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도 말이다. 능력도 오락가락하여 등장인물이 필요에 따라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한다. 초반에 퉁소로 사람들을 잘도 제압하던 남희신은 정작 필요할 때는 퉁소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까 그 주술을 사용했으면 됐잖아 싶은 경우가 허다하다. 그 와중에 가장 웃겼던 것은 전투가 극에 달하면 갑자기 검을 검집에 회수하고 악기를 꺼내 연주한다. 맨 마지막 즐거운 합주 시간은 약간 어이가 없었다. 뭔가 변신 마법물을 보는 기분이다. 무기를 들고 싸우다가, 적이 강하다 싶으면 뮤직 파워! 게다가 청심음 뽕짝멜로디에 빵 터진 사람 나뿐인 건가.

    마지막 관음묘에서 이야기를 다 매듭짓기 위해, 각 문파의 종주나 대표주자를 잡아놓더니, 속박하거나 무기를 회수하지도 않고 퍼질러 앉혀놓은 상태에서 강신무 하듯 대 난장을 펼친다. 상황도 개연성이 떨어지는데 이 부분이 너무 길게 몇 편동안 진행되어 지루했다. 무협은 없고 속칭 아가리파이터들만 있는데, 썰전을 보는 기분이다. 금광요와 소섭이 대환장 파티를 하는 동안 남잠 성우는 대사가 거의 없어서 숙면을 취했을 듯싶다. 남잠은 가뜩이나 대사도 없는 데다가 고어체까지 사용해서 말이 더 짧은데 말이다. 

    보아하니 진정령 세계의 능력 끝판왕은 금광요이고, 의외의 다크호스는 소섭이다. 선문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하는데도 금광요는 일도 잘하고, 사회생활도 잘하고, 음률에도 뛰어나고, 영력도 높고, 검술도 뛰어나고, 기억력도 좋다. 능력 좋은 선역들에 대항하기 위해 초능력자인 악역을 만들어냈다.

    결과적으로 비천하게 태어나 열등감에 쩔은 풀파워 능력자들은 다 악역이고 얘네들이 세상을 악화시키는 내용인 데 비해, 집안 좋은 능력자들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선역이다. 위영이 한문 출신이라 이 도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알고 보면 엄마가 또 능력자라 결국 우수한 유전자 드립을 하게 만든다.

    남잠은 고소 남씨 가문 서열 3위인데 시종일관 집안에서 너무 두들겨 맞는다. 물론 이게 멋있는 거긴 하지만(나도 안다 그 맘). 다만 고소 남씨의 무술이나 몇몇 선문의 무술에서 소위 간지를 폭발시키기 위해서 광수의(소매가 넓은 옷)를 입고 펄럭이며 싸우는데 저게 가당키나 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진왜란 때 명의 장수는 조선의 장수가 높은 관을 쓰고 넓은 소매가 있는 옷을 입은 것을 보고, 저렇게 입고 전쟁터에서 싸우기나 하겠냐며 비꼬는 시를 쓸 정도였다. 그 시를 고소 남씨에게 들려줘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검은 찌르는 용도인데 지나치게 베는 방식으로 무술장면을 연출하여, 간지도 중요하지만 현실성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 같은 인간에게 넓은 소매를 입고 베는 검은 여러모로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간지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간지 때문에 무협 보는 거 아닌가. 와따시모 다이스키. 

    이상 까는 글을 써댔지만 꽤 재미있게 봤다. 그리고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배우들 인터뷰.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