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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니] 사이코패스 (Psycho-pass, サイコパス, 2012)
    오덕기(五德記)/日 2014. 4. 14. 16:21

    본 지 겨우 2주일밖에 안 되었는데, 그 사이에 넘버스라는 미드를 달렸더니 내용이고 감흥이고 아득하기만 하다. 아래는 줄거리 따위 없는 사이코패스 감상문.





    사이코패스. 꽤 호평을 받던 작품이라 궁금해하던 차에 우연히 접한 초반 장면의 잔인함에 아연실색하여 포기. 그러나 <서검은구록>을 보면서 안면인식장애가 극에 달해 내용을 이해할 수 없는 엄혹한 현실에 지쳐버렸다. 중드 보면서 이렇게 고통 받을 바에 차라리 잔인한 애니메이션을 보겠다며 다시 싸이코패스를 꺼내들었는데, 아뿔싸 이거 재미있어서 그대로 이틀만에 정주행 완료.


    애니메이션 고를 때, 보통 만화나 소설(라이트 노벨 포함) 원작이 있는 작품을 최우선으로 하고, 아무리 원작이 있어도 게임 원작은 피하는 편이며, 순수 창작물도 후순위로 밀어버리는데 이는 2000년대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주조(혹은 망조)를 이루고 있는 모에형 오타쿠 양산에 타겟을 둔 작품을 피하고픈 애처로운 몸부림이라 하겠다. 순수 창작물 중에는 물론 카우보이 비밥과 같은 대작도 있긴하지만, 에반게리온, 유레카세븐, 흑의계약자, 에스카플로네 같이 수작이지만 뭔가 서사의 밀집도에서 에멘탈 치즈마냥 송송 구멍이 뚫린, 꽉 차지 않고 어딘가 텅 빈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많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는 사이코패스도 후자에 속하기는 했지만 예로 든 작품들에 비해서는 서사의 밀집도를 높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있다. (덕분에 살짝 진부해졌지만)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기시감'.


    흑의계약자나 공각기동대(이상 애니메이션), 마이너리티리포트, 이퀄리브리움(이상 영화)이 계속 생각나는 것은 장르특성과 기본 설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세밀함에서 상당히 창의적이었다. 시청자가 보기에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인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유토피아라고 인식하며-심지어 시스템에서 거부 당한 사람들조차-현존 시스템을 지켜나가거나 여기에 편입하려는상황이 묘한 이격을 일으키며 흡인력을 가진다. 그러다가 중후반부부터 시빌라 시스템의 진실이 공개되는데 솔직히 여기에서 김 빠졌다. 세상을 지배하는 흑막이 있고, 객관적 시스템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결국 사람에 의해(그것도 사이코패스들에 의해)이루어졌다는 설정으로 뒤통수 치고싶은 제작자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는 바이나, 그 순간 내가 봐도 디스토피아, 거기 세상 사람들이 봐도 디스토피아가 된다. 서로 평행선을 이루던 시청자와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의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 팽팽했던 긴장이 사라지며 내용이 단순해진다. 이제 시빌라 시스템은 어쩔 수 없는 타도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물론 완전하게 노출된 진실 속에서 혼란에 빠진 여주인공에게 시빌라 시스템이 전하는 멋진 말 한마디가 이 애니메이션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증명하지만 말이다. "당신은 시빌라 시스템에 대해 완전하게 상반된 감정적 반감과 이론적 평가를 품고 있다." 와우. 누워서 보다가 이 장면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사이코패스에는 파스칼이니 데카르트, 벤담 같은 철학자부터, 윌리엄 깁슨, 조지 오웰, 셰익스피어, 조셉 콘라드, 필립 딕, 조나단 스위프트, 프루스트와 같은 작가 및 작품들이 총출동하고,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계속적으로 찬조 출연한다. 이들이,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작품이나 개념이 사이코패스의 모티브를 이룬다. 나는 배(작품)보다 배꼽(인용)이 더 큰 작품, 쉽게 말해서 멋 내려고 이런 전고를 모티브로 사용하는 작품은 좋아하지 않는다. 자칫 잘못하면 조소만 (정확히 말하면 썩소만) 자아내게 할 뿐이다(이쯤에서 곰탕처럼 우려먹는 흑집사의 예(링크). 꽥). 그런데 사이코패스에서 대놓고 상기 인물이나 작품들을 이야기할 때조차 별로 그런 느낌을 못 받았다. 일단 작품과 인용이 잘 녹아들었고, 이 작품을 쓴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작품에 내재화 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잡설이지만 저렇게 대놓고 인용한 사람들 말고, 진퉁 세계관 설정(특히 시빌라 시스템의 설정)은 탈콧 파슨스의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시빌라 시스템의 단위행동(unit act)이나 기능론적 관점을 드러낸 부분이. 



    마지막 코우가미와 마키시마의 둘만의 결투 장면은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와 비셔스의 격투신 느낌이 났다. 머리카락 색도 비슷하고 몸동작의 가벼움도 그렇고, 마키시마가 들고 있는 무기도 그렇고. 마키시마는 비셔스의 잔학성에 자신만의 논리와 가치관과 정당성을 가미한 악역 느낌이랄까. 그런데 이 장면에서 둘 다 칼을 가지고 싸우는데 무협에서 쓰는 검과 달리 실생활에서 쓰는 칼 가지고 싸우니 현실감이 너무 넘쳐서 난 싫었다. 더 무서워. -_-;




    기타 잡설


    * 애니메이션 전반적으로 참 잘 만들었는데 가끔 캐릭터의 입이 헛놀 때가 있다. 분명 입을 움직였는데 대사가 아예 없거나, 입술은 '와까리마시따'정도로 길게 움직이는데 대사는 '하이'만 한다거나. -_-;;; 


    ** 사람은 편리함을 위해서 중요한 것을 쉽게 포기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이다. 범죄를 피하기 위해서 인신을 잠재범이라 구속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우리도 일신의 편리함을 위해 개인정보를 쉽게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교통카드, 신용카드 이런 것도 결국에는 편리함을 위해 포기하고 있는 내 개인정보. 그런데 내 주민등록번호 돌리도. -_-;


    *** 묘하게 백합물과 BL물을 아우르는 능력이 있다. 절대 모에물이 아닌데 잠재적 고객은 충분해 보임.



    **** 수미쌍관 하나는 제대로이다. 이렇게 시리즈는 계속 되겠구나.


    ***** 노래와 배경음악이 정말 좋다. 애니메이션 오프닝과 엔딩을 귀기울여 들은 것이 얼마만인지!


    ****** 나도 아나키스트이지만 도저히 마키시마에 공감이 안 간다. 그는 일단 파괴하고 성립하려하고 있고, 나는 성립될 힘을 기를 때까지 파괴를 연기하겠다이고. 게다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공동체의 가치라고.


    ******* 잔인한 장면에 간이 쪼맨해져서 뭔가 무서운 장면이 나올 때마다 화면도 작게 하고 소리도 낮추고...... 도대체 언제쯤 잔인함에 대한 내 역치가 높아질까. 덱스터 같은 작품도 보고싶다. ㅠ.ㅠ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