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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배를 엮다(舟を編む)>를 빙자한 잡다한 이야기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14. 5. 13. 17:12

    여느 때처럼 일본에 사는 친구와 통화하던 중이었다. 그 친구는 TV에서 해준 영화를 녹화했다며 내일 볼 거란다.

    "제목이 후네오아무(舟を編む)인데, 뜻이 후네가...,"

    "배를 엮다?"

    "어, 너 어떻게 알아?"

    나의 비루한 일본어 어휘력-_-을 잘 아는 친구가 놀란다. 

    "그 책 재미있다 그래서 읽으려고......."

    "이거 소설도 있어? 난 TV에서 해줘서 보려고 하는데."


    그리고 다음 날 그 영화를 본 내 친구가 소감이라며 마이피플로 "엄지 척"을 보냈고, 한국에서의 영화 상영일 마지막을 앞둔 나는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책을 보기로 결정했다. 절대 광화문까지 가기 귀찮아서이다. -_-; (우리나라에서는 <행복한 사전>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영화를 주로 개봉하는 극장에서 상영했다)




    언제나 말하지만 나는 소설을 즐기지 않는다. 환타지소설, 무협소설, 추리소설, 라이트노벨, 그래픽노블같이 '소설'이라는 말 앞에 자그마한 사족을 붙인 장르문학조차 간간히 볼 뿐이고, 세칭 순수문학이라는 것은 작년 아니 재작년에 접한 <머리 속의 악마>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이후 발길을 끊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문학청년의 로망. 주로 세계명작류를 중심으로 몇 년에 한 번씩 소설에 대한 지름신이 오곤 한다. (바로 요즘! 빠-밤!)


    <배를 엮다>는 아주 쉽게 읽히는 책이다. 세계명작류와 라이트노벨류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후자라고 할 정도. 그렇다고 이야기 자체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번역이 유려했다. 사실 일본어나 중국어 번역작들이 한자문화권 하에 놓여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말이 반쯤 되다마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게 드물다. 분명 고심하는 번역가가 작업한 작품이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아직 몰입이 덜 되었는지 복선이니 하는 것들이 빤히 보일 때마다 에이~하면서 책을 들고 있던 손을 놓고는 했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내가 예상했던 복선들이 깨지면서 한 편의 잔잔한 영화처럼 전개된다. 나는 사실 마지메라는 감정 표현 서툰 주인공이 언어의 바다를 건너는 "대도해"라는 사전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외적으로는 실생활에 사용되는 언어를 잘 풀어내고, 내적으로는 자신의 마음(특히 사랑)을 언어로 풀어나가게 되는 성장 과정을 그린 작품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이 책은 내가 매번 감탄해 마지않는 일본 특유의 장인 정신, 꼼꼼하다 못해 깐깐하기까지 한 장인의 고집을 담담하게 그렸다. 사전에, 책에, 그리고 언어에 미쳐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이리도 재미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장미의 이름>처럼 살인 사건 하나 없이 말이다. 먹물쟁이들이 표제어 하나 빠진 것을 채우겠다며 마지막까지 뒷심도 두둑하게 자신의 분야에 묵묵하게 몰두하는데 묘하게 마음이 일렁인다. 뭐, 말이 좋아 장인이지 일종의 언어, 요리, 종이 덕후들의 향연이었지만 말이다. 사전용 종이의 최종 통과 이야기는 이게 뭐라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이었는지 -_-;; (눈물을 글썽이는 스스로에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 그러나 그 오그라든 손을 펴서 최종 통과했다는 종이를 만져보고 싶은 이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사전 만드는 이야기에 특히 감정이입이 되었던 까닭은 내가 지금도 사전을 항상 끼고 사는 데다가 예전에 사전을 만들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났기 때문일게다. 함정이 있다면 辭典이 아니라 事典이었다는 것. 나는 원고를 썼었는데(주로 중국어로 된 표제어 해설을 날림으로 번역했다 -_-) 이게 보통 노력이 들어가는 작업이 아니었다. 이 사전은 내가 원고를 넘긴 지 근10년 지난 요즘 출간이 되었다는 소문만 들었다. (난 원고료 떼였을 뿐이고 -_- 당시에는 아쉬워했지만 지금은 그냥 공부한 셈 친다) 뭐 내가 작업에 참여했던 事典말고, 또 많이 생각난 것이 예전에 공부하면서 많이 읽었던 <사원(辭苑)>, <사해(辭海)>(이상 중국),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대만) 그리고 속칭 모로하시라고 불리는 <대한화사전(大漢和辭典)>(일본). 내가 사랑에 마지않던 모로하시를 만든 이들도 이토록 묵묵하게 작업했겠지 라고 생각하니 뭐 하나 녹녹하게 보이지가 않는다. (하지만 이제 필요 없으니 팔고 싶을 뿐 -_-; <대한화사전> 정말 좋아요. <중문대사전>에 비교 불가 -_-; 혹시 사실 분은 010-9...... 쿨럭)


    소설 <배를 엮다>라는 책을 읽다보면 불교의 느낌이 물씬 난다. (언어의) 바다를 건너 진리(의 피안)를 향해 함께 타고 갈 수 있는 큰 배라니, 마치 대승불교에서 설하는 중생이 함께 극락정토로 가기 위한 마하야나(큰 수레)같다. 그리고 때가 때인지라 배에 구멍 하나라도 용납할 수 없다며, 표제어 하나에 지옥의 합숙 검토 작업을 하는 장면이 더 마음을 크게 때린다. 표제어 하나 빠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소중한 우리네 생명인데 말이다.


    조만간 영화도 보게 될 듯 싶다. 이유는 용례채집카드가 궁금해서. 오다기리 죠가 궁금해서 ㅋㅋ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