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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코) 프라하의 대규모 시위, 부다페스트로의 야간 기차
    여행/체코-헝가리 2020. 5. 20. 14:24

    우리는 엄청난 인파를 뚫고 가야 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른 채 말이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보니 체코어라 읽을 수 없지만 도널드 트럼프 얼굴도 보이고 다들 분노한 느낌이다. 처음에는 오늘 무슨 록 콘서트 행사가 있나 했다가 차츰 시위대구나 하고 눈치를 챘다. 무슨 일인지 궁금한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데이터 통신이 되지 않아 구글맵도 안 뜬다. 나는 KPN 유심, 친구는 EE유심이었는데, 여행 내내 KPN유심이 훨씬 속도가 빨랐는데, 지금은 친구의 EE 유심만 작동한다. 전차 등도 모두 교통이 통제되어서 친구의 핸드폰 구글맵에 의지하여 여러 블록을 걸어가야 했다.

    저녁을 먹으러 가는 걸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사람 많은 곳은 쥐약이라 이미 정줄을 놓고 있었다. 거대 모아이 석상 사이를 통과하는 사람들처럼 이유는 모르겠지만 사람들 숲을 헤치고 지나가는 우리 눈에는 다른 이들의 얼굴이 아닌 다리만 보였다. 그마저도 친구가 이끄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 평화로운 시위였지만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 정도의 시점. 왜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Pivovar U Medvídků라는 음식점이다.

    지인의 추천을 받아 간 곳이었는데 사람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았다. 체코인들은 다들 시위하러 갔나 보다. 이곳에서 흑맥주 두 잔과 꼴레뇨를 시켰다. 흑맥주는 수도원의 맥주에 비할 바 못 되었고, 꼴레뇨는 차갑고, 껍질은 껍데기 수준으로 딱딱했으며, 고기도 질기고 잡내도 났다. 나는 평소 돼지족발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지만 집 근처 뽕족이 갑자기 그리워졌다. 오늘이라도 먹을까. 뽕나무쟁이 족발.

    우리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무슨 시위인지 확인해봤다. 뉴스를 찾아보니 체코 총리인 안드레이 바비스가 EU 보조금을 본인의 사업체로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어, 사퇴를 촉구하는 시위였다. 시위는 4월부터 계속되고 있었는데 오늘(2019.6.4)은 전국단위의 대규모 시위로 약 12만 명이 바츨라프 광장에 운집했으며, 이는 1989년 벨벳혁명 이후 최대 규모라고 한다. 바비스 총리는 억만장자 사업가 출신으로 정치계에 투신한 사람으로 체코판 도널드 트럼프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래서 그렇게 피켓에 도널드 트럼프 어쩌고가 많았나보다. 

    (맛없는) 고기를 씹으며, 이제 기차역으로 다시 어떻게 돌아가나 걱정하였다. 그러나 이미 시위는 어느 정도 해산하였는지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무사히 전차를 타고 기차역에 도착하였는데, 시위대가 여기 다 모여 있다. 보아하니 체코 각지에서 이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얼굴에 페인팅을 한 사람도 있고, 피켓을 든 젊은이 무리도 있다. 아직 의분이 남아있는지, 누군가가 무슨 구호를 외치면 지나가던 사람들도 같이 구호를 외치고, 환호하며, 박수를 보낸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에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괜스레 기분이 울컥하다. 

    우리는 유인 짐 보관소에 맡겨놓은 짐을 찾고, 체코 남은 돈을 털어내기 위하여 간단한 간식거리 등을 마트에서 구입하였다. 그리고 기차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피아노가 있고, 아무나 원하는 자가 피아노를 친다. 친구는 내게 어디 함 쳐보시지라고 한다. 머릿속에서 무슨 곡을 칠까 레퍼토리도 떠올려봤으나 갑자기 쫄보력이 급상승하였다. 게다가 손때가 많이 탄 물건은 영 만지기가 마뜩잖다. 

    기차 플랫폼이 뜨기를 기다리는데, 연착이 되는지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우리 말고도 수백 명이 대기실에서 기차 상황을 알려주는 현황판을 보며 기다렸다. 

    프라하에서 부다페스트에 가는 야간열차는 두 종류가 있는데, 부다페스트 도착시간은 같지만 프라하에서의 출발 시간이 다르다. 하나는 밤 10시경 출발, 다른 하나는 자정에 출발한다. 오후 9시 56분에 출발하는 기차 편은 중간에서 몇 시간 정차하는데, 그 시간이라도 푹 자보자는 마음으로 우리는 이 기차 편(IC 573)을 예약하였다. 그런데 웬걸, 그냥 주욱 잘 잤다.

    티켓에서 보이는 숫자 362는 차량 번호이고, 52, 56은 좌석 번호이다. 우리는 디럭스로 예약하였는데, 샤워시설을 갖춘 화장실이 있는 2층 침대 방이다. 각 방문도 다 걸어 잠글 수가 있어서 도난 방지도 된다. 이렇게 두 명이 디럭스 침대칸을 예약하는데 총 110유로가 들었다. 지금껏 중국 광주에서 계림으로 가는 야간기차 (3층 침대)밖에 못 타본 우리는 매번 야간침대기차 타기를 소원하였다가 드디어 그 꿈을 이루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기차 플랫폼이 표시되자마자 우리는 가방을 들고 잰걸음으로 이동했다. 아직 기차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기차가 들어오자마자 사람들이 모두들 가방을 끌고 달리기 시작한다. 침대칸에 탑승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아시아인이었다. 우리는 출력해간 티켓을 검표원에게 보여주고 탑승. 

    방에 들어오니 의외로 매우 좋다. 한쪽에는 2층 침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화장실이 있다. 친구는 1층에, 나는 2층에 자리 잡았다. 둘 다 있는 대로 신이 나서 방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500ml 생수도 다섯 병이나 있고, 어메니티도 제공한다. 화장실에서 수도를 사용하려면 수전을 한 번 꾹 누르면 일정량의 물이 나오는 방식인데 매번 그렇게 누르며 머리도 감고 샤워도 다 마쳤다. 화장실 공간 활용이 끝내준다. 이 좁은 곳에 필요한 것은 다 있다. 세면대나 변기 높이가 폴란드만큼 불편하지는 않다. 

    어메니티

     

    온도도 방에서 각자 맞추도록 되어 있다. 2층 상담 침대 맞은편에 캐리어를 보관할 수 있게 해놨는데, 어떤 천하장사가 이 곳에 캐리어를 올릴 수 있을까 궁금하다. 문 위에는 방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 등이 있다. 침대 머리맡에는 독서등도 있다. 정말 좁은 공간에 없는 것이 있다. 

     

    다만 아래 사진처럼 사다리가 침대 맞은편에 있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건너편 침대로 몸을 옮긴 다음 안전바를 세워야 한다. 나는 이런 닌자 놀이를 엄청 좋아하지만, 호오가 갈릴 성싶다. 화장실 냄새가 난다는 후기도 있었는데, 우리 방에는 그런 건 없었다(둘 다 개코). 

    기차는 곧 출발하였다. 덜컹거림에 잠이 안 올 것 같았지만, 곧 폭풍 숙면. 중간에 기차가 한참 멈춰 있는 느낌도 들긴 했다. 아래층에 있던 친구는 동천이 밝아오면서 보이는 창 밖 풍광이 참 아름다웠다고 한다. 

    도착 30분 전쯤이던가, 각 방마다 차장이 돌아다니며 노크로 깨운 후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1층으로 내려와 친구와 함께 바깥을 내다보며 아침 식사를 즐겼다. 오늘도 날씨가 참 좋다. 여행 오기 전에 봤던 그 폭풍뇌우 예보는 다 어디 간 것일까.

     

     

    히키 성향의 우리에게 좁디좁은 기차 침대칸은 제격이다. 침대기차 여행은 몇 번이고 더 하고 싶다. 단 디럭스룸으로.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였다.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