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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드BBC] 남과 북(North and South) - Elizabeth Gaskell
    오덕기(五德記)/등등 2021. 3. 3. 16:33

    하나뿐인 친구가 <남과 북>을 추천하였다. 몇 번을 보려고 시도하였지만 3분을 못 버티고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2021년은 안 본 것을 보기로 한 원년이다. 주야장천 틀어 젖혔던 프레이저, 빅뱅이론, 모던 패밀리, 고독한 미식가 대신 새로운 것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면 보라 하였지만, 제인 오스틴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예전에 정말 뜬금없이 영화 <제인 오스틴 북클럽>을 보고 잠시 책을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소설 읽기는 언제나 뒷전이다. 이 엘리자베스 개스켈이라는 작가는 제인 오스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다. 혹자는 사회상을 담은 제인 오스틴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드라마에서는 소위 제인 오스틴 적 냄새와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상이 잘 버무려져 있다(아마도).

    참고로 이 소설은 BBC에서 두 번 드라마화되었는데, 첫 번째는 1975년이고, 두 번째는 200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바로 내가 본 작품이다. 

    그런데 어떻게든 견뎌내며 보기는 했는데 (주로 게임을 하며) 이런 종류의 로맨스에 항마력이 낮은 나에게는 어처구니없는 클리셰의 반복이었다. 그럼에도 한 번은 얘기해 볼만한 작품이랄까.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그렇다(즉 아래는 스포라는 뜻이다). 주인공인 마가렛 헤일은 목가적인 풍경의 남쪽 마을에서 가족과 함께 북부 공업 도시인 밀턴으로 이주하게 된다. 원래 목사였던 아버지는 밀턴에서 가정교사를 하며 생계를 꾸렸는데 그중에는 존 손튼이라는 공장주이자 치안판사가 있다. 즉 이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그런데 어쩌려는지 둘의 첫 만남은 손튼이 담배를 몰래 피우려던 노동자를 후드려패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긍지 높은 숙녀인 마가렛은 하찮은 자본가의 비신사적인 행동에 분개하고 거리를 두려 한다. 손튼 집안 어머니와 딸의 무례함과 속물근성에 치를 떤 마가렛은 훗날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는 히긴스와 그의 딸인 베시와 더 친밀하게 지낸다. 

    이 와중에 마가렛은 어머니의 병세가 심해지자(갑자기 중병에 걸림) 물침대를 빌리려고 손튼 씨의 집에 가고 그곳에서 노동자 파업에 휘말리게 된다. 그곳에서 마가렛은 노동자와 직접 대화하라고 손튼을 설득하고, 반발을 산 손튼을 지키려다가 대신 돌 맞고 기절한다. 그 행동이 본인을 사랑해서라고 생각한 손튼은 마가렛에게 갑자기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고백한다. 여기에서 눈이 휘둥그레진다. 손튼이 마가렛을 좋아한다는 티를 낸 적이 없어서 (혹은 내가 느끼지 못해서, 하지만 시청자의 98.7%가 느끼지 못할 듯)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에 대경실색. 어쨌든 여자는 거절하고 손튼은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갑자기 너무 비통해해서 또 당혹). 한편 어머니가 위독하자 마가렛은 선상 반란을 일으키고 스페인으로 도망간 오빠를 소환한다. 그 오빠와 기차역에서 한밤중에 헤어지는 모습을 손튼이 보고 연인이라고 오해한다. 이 기차역에서 마가렛의 오빠와 몸싸움을 벌이던 인물이 갑자기 시체로 발견되자, 마가렛은 오빠를 보호하기 위해 그곳에 방문한 적이 없다고 위증을 한다. 손튼은 이미 그것이 위증인 것을 알지만 치안판사의 힘으로 사건을 덮는다. 

    그렇게 어머니가 죽고, 마가렛의 아버지는 오랜 친우이자 마가렛의 대부이기도 한 벨과 옥스퍼드로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갑자기 의지할 사람이 없어진 마가렛은 다시 이모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벨은 자신의 대녀인 마가렛에게 유산을 상속해준다. 벨은 손튼 공장의 지주이기도 하다. 당시 손튼은 파업의 여파로 공장 문을 닫게 되었는데, 마가렛은 상속받은 유산으로 손튼을 도와주기로 한다. 손튼도 그간의 일이 모두 오해였음을 알고 마가렛이 있던 헬스턴을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한다. 그리고 그렇게 남과 북으로 향하는 기차역에서 둘은 우연히 재회하고 함께 한다. 

    <남과 북>의 독자들은 전통적인 남부 상류층과 북부의 신흥 자본가 계층의 반목, 산업혁명 시기에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한 연민과 동조, 여성의 자주적인 삶에 대한 관심 등의 당시 사회상과 개혁적인 측면을 개스켈이 소설 속에 잘 녹아들게 묘사하였다는 점에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드라마가 겨우 4부작이라는 점을 봤을 때 장치라고 생각했던 사회상 부분이 꽤 중요하게 묘사되면서 이야기 전개가 느슨해졌고, 오히려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의 러브라인이 흐릿해져서 시청자가 돌연 어리둥절하게 되는 단점이 있다. 

    거의 200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넘어갈 문제이지만, 낯 간지러운 클리셰가 차고 넘친다. 우연히 잘도 마주치는 남주와 여주가 있다. 게다가 오해를 쌓게 되는 상황은 너무나 1차원적이다. 주인공에게는 결점이 없다. 오로지 환경만이 그들의 결점이다. 남주에게 있어서는 속되고 편협한 어머니와 역시나 속물근성 넘치고 히스테리컬 한 동생이 그 환경이다. 남주에게 고통은 현재에 있지 않고 오로지 과거의 환경에 있으며, 오히려 그 고통스러운 과거가 현재의 그를 입지전적의 인물로 만들면서 빛나게 해 준다. 여주의 고통은 주변 사람의 몰살 혹은 가족의 부재이다. 갑자기 친구인 베시와 어머니와 아버지가 차례대로 죽고, 하나 있는 오빠는 질투심 혹은 갈등 유발자로만 잠시 등장하고 사라진다. 지독한 가족의 부재는 주인공 자체가 가진 품위를 해치지 않으면서 주인공에게 고통을 주는 일반적인 클리셰 아닌가. 

    그다음에 등장하는 최종 보쓰 클리셰가 나오는데 이 모든 상황을 한큐에 해결해주는 유산 상속이다. 제인 오스틴의 작품들 속에서,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소공녀에서, 그리고 이 작품에서 모든 갈등을 종식시켜주는 것은 바로 뜬금없는 거대한 유산 상속이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유산 상속부터 시작해서 그게 다가 아니야라는 식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흥부전>은 그것 자체로도 클리셰가 뚝뚝 떨어지지만 유산 상속이 끝판왕이야라고 말하는 진부함에 비하면 새로울 정도이다. 당시의 상속권에 대한 다양한 논란을 반영한 산물이긴 하지만, 손 안 대고 코 푸는 식의 갈등 해제 방식은 너무 쉬운 길이다. 클래식이 시대에 뒤쳐져 이 시대에 맞설 힘이 부족했다면, 배태된 드라마는 시대와 싸워서 이겨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에서 탁월했던 장면은 처음 면화 공장에서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과 엔딩 장면이다. 공장 안에는 면섬유의 보풀이 날아다닌다. 마치 눈이 오는 것 같은 풍경이지만 노동자가 이 섬유먼지를 흡입하면 면폐증으로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산업혁명 시기 공장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을 보여주는 지옥과도 같은 광경인데 화면에서는 아름답게 비친다. 극도로 비참한 아름다움. 아름다움이 곧 선함은 아니라는 관념을 이렇게 잘 표현하는 장면이 또 있을까. 그 안에서 둘의 만남은 흐릿하고 몽환적이고 파괴적이다. 한편, 엔딩에서 둘은 각각 남과 북으로 향하는 기차의 기착지에서 마주한다. 각각 향한 방향도 다르고 출발한 곳도 다르지만 둘은 이곳에서 화해하고 화합한다. 궤를 달리하던 남과 북이, 그리고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장면으로 이 중간 기착지만큼 좋은 곳이 있을까. 드라마의 아쉬운 점을 일거에 날릴만한 좋은 엔딩이었다.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