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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길모어 걸스>와 <선술집 바가지>에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를 더하고 이스탄불을 추억하기
    오덕기(五德記)/등등 2021. 9. 13. 12:22

    요즘 영어 공부한답시고 <길모어 걸스>를 즐겁게 본다. 넷플릭스 알고리즘에서는 <선술집 바가지>가 걸려서 덩달아 시청했다. 

    <길모어 걸스>는 한 소도시 아니 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이뤄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길모어 걸스의 배경인 스타즈 할로우에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 간의 사정을 속속들이 안다. 이웃이 키우던 고양이 장례식에도 모이고, 마을 행사도 많다. 매번 같은 음식점에서 모여 밥을 먹고 헤어지고 슈퍼마켓도 하나이다. 그들은 그 부모 대부터 알고 있고, 각자의 성장 과정도 지켜보았다.

    <선술집 바가지>는 도쿄의 변두리에 위치한 한 음식점 이야기를 다룬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두 딸은 부모가 운영하였던 남긴 작은 음식점을 잇게 된다. 이 음식점에는 부모 대부터 이용했던 단골들이 출근 도장을 찍는다. 이 음식점 사장과 손님들 사이에는 끈끈한 라포가 형성되어있다. 손님의 고혈압이 걱정되어 음식을 신경 써주고, 누군가 어머니 손맛을 그리워하면 그 음식을 준비해준다. 부모를 잃고 쓸쓸하게 명절을 보낼 자매가 걱정된 손님은 함께 명절을 쇠어주기도 한다. 

    <선술집 바가지>를 보면서 처음에는 굉장한 어색함을 느꼈다. 나는 자주 가던 음식점도 주인이 "또 오셨어요?"라고 아는 체를 하면 다시 발걸음 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곳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스트레스이다. 그래서 동네 장사를 하는 <선술집 바가지>의 단골들과 사장 자매의 정서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다행이라면 이 드라마에서는 티격태격이나 과도한 관심이 빚어내는 입방아가 거의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만 다룬다. 전형적인 힐링 물이랄까. 그래서 어느 사이에 그들의 정서에 동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덜 어색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같은 공간을 향유하는 인물들이 촘촘한 관계망을 형성하는 이 두 드라마 속 이야기는 정서적으로 내가 견뎌야 할 대상이다. 태생이 도시인 이고, 뼛속까지 도시인 이라 그런지 대도시 특유의 공고한 경계를 바탕으로 거리 두기, 군중 속의 고독, 그리고 그 안에서 배태되는 자유를 즐긴다. 인격적 접점이 형성되고 경계가 해체되면서 원치 않게 연결되는 관계는 속박이다. 그래서 예전 미국의 작은 도시에 살 때는 마트도 새벽에 갔다. 가능하면 눈에 띄고 싶지 않고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에 따르면 도시인은 수많은 자극으로부터 충격과 내적 동요를 줄이기 위해 감정절제와 지성에의 의존이라는 방어 메커니즘을 형성한다고 한다. 즉 둔감함과 차가움은 도시인의 상징이다. 그래서 도시인들은 지하철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봐도 무관심할 수 있고, 역으로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지하철 안에서 화장을 하고, 앞머리에 세트를 말고 있을 수 있다. 무수한 사람들과의 쉴 새 없는 만남에 매번 반응을 보이면 내적으로 굉장히 피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속내를 감추고 있지만 이런 자극에 대해 반감과 적대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다만 너무나도 이런 상황이 많아 무관심할 뿐. 나는 이것도 마뜩지 않았다.

    그러다가 터키 이스탄불을 간 적이 있다. 이스탄불은 실로 놀라운 도시였다. 엄청난 대도시이고, 기본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지만, 그럼에도 지나가는 개체를 사람으로 인식하고 관심을 표했다. 내가 길을 헤매는 듯한 어리숙함을 보일라치면 갑자기 사람들이 다가와 나의 목적지를 묻고 안내해주고는 했다(비록 틀린 곳으로 안내하더라도). 내가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을 지나친 듯한 몸짓만 취해도 주변 모두가 버스 벽과 창문을 치며 차를 멈추라고 고함을 쳤고, 무사히 하차하여 고마움을 표하는 내게 버스 안 승객 모두가 손을 흔들어 줬다. 이스탄불은 짐멜이나 수많은 모더니즘 연구가가 말한 도시의 특징에 긍정적으로 역행하는 공간이었다. 간섭이 아닌 관심과 배려가 있는 도시가 존재한다면 그곳은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이런 경험조차 없었다면 나는 이 두 드라마의 관계를 간섭으로만 여기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대도시를 따뜻하게 만들려면 필요한 것이 바로 따뜻한 관심 아닐까.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