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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by E.T.A 호프만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21. 10. 20. 12:59

    호프만의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 이런 책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독일 낭만주의를 전공하는 지인이 같이 읽어보자고 하여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특유의 문체나 전개 방식이 적응이 안 되어서 고행하는 기분으로 읽어야 했다. 읽다가 갑자기 묘한 기시감이 생긴다. 이런 느낌의 소설을 본 적이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봤다. 역시나 그 책이 나왔다. 바로 <악마의 묘약>. 예전 판타지 소설을 한창 찾아볼 때, 서양 판타지 소설의 뿌리라고 하여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환상 소설의 뿌리 찾기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책을 끝까지 못 읽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그 이후 판타지 소설에서 손을 놓게 되었다. 얼마나 강력한 책인가. 그런데 내가 돌고 돌아 다시 이 사람의 책을 보고 있다니 한동안 뜨아했다.

    매주 독서 토론을 한다고 모여야 했기때문에, 나는 어쨌든 진도를 뺐다(내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책임감이 강한 타입이다 ㅋㅋ). 중간에는 책에 대한 급격한 회의로 그만 읽자고 말하고 싶었다. 당시 다른 친구와 함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있었는데(아직도 다 못 읽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은 세월의 흐름과 싸워 완벽히 이긴 클래식의 전형을 보여준데 비해, 호프만의 책은 구시대의 감성을 극도로 자아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대함만 더 빛나게 하였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로 여차 저차 하여 다 읽고, 번역자의 해제까지 보는 기염을 토하였다. 다 읽고 나니 은근 마음에 들어서 논문도 찾아볼 정도였다.

    이 책은 두 가지 이야기가 착종하여 전개된다. 하나의 큰 줄기는 수고양이 무어의 자서전이다. 다른 하나는 악장 요하네스 크라이슬러의 전기이다. 이 두 별도의 텍스트는 어쩌면 편집자의 실수로 교열도 되지 않은 채 출판되고 만다. 그것도 한 장이 정확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파지(fragment)의 형태로 문장도 끝맺지 못한 채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읽다보면 현대의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다. 마치 배우가 "네가 감히!"라고 분노하면서 화면이 흐려지고 엔딩곡이 나오는 긴장감을 준다. 다음을 궁금하게 만드는 기법 말이다. 이 책도 외형은 이렇게 전개되지만, 이 파지라는 방법론 자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파지, 혹은 파편은 독일 낭만주의의 전형적 특성이라고 한다. 당시 '파편'이라는 글쓰기 형식은 철학적 사유를 전개하는 중요한 형식으로 이해되었다. 자못 무질서한 카오스처럼 보이는 파편이지만 이를 통해 기존에 답습되었던 철학 규범을 비판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파편의 조합과 해체를 반복함으로써 새로운 체계를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려는 일종의 사유 방편으로 작동하였던 것이다.

    이런 식의 파편적 글쓰기를 떠올리다보니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일방통행로> 등이 생각났다. 책 한 권이 하나의 주제를 관통하는 기존의 편집 방향은 온데간데 없고 책 전체가 파편화된 사유만으로 가득하다. 예전에 벤야민의 저작을 읽으면서 이 책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의문을 품었는데, <수고양이...>를 읽고 전공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어쩌면 김정운이 <에디톨로지>에서 이야기한 독일식 인덱스 카드 학습법이 편집의 자재성을 열어줌으로써 언제든 새로운 사유체계로의 길을 터주는데 이런 것도 바로 이 독일 낭만주의의 파편에 전범을 삼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책의 제목은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이지만 파지로 함께 섞여들어간 요하네스 크라이슬러 악장의 전기(전기이지만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는 배경이고 수고양이 이야기는 전경이지만 이 분리 불가능한 텍스트는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를 변증법적으로 교차하고, 때로는 배경과 전경이 역전되며, 서로를 해체하고, 재귀적으로 진행된다. 특히 이 재귀성은 거울의 양면과도 같아서, 비슷한 사건이, 비슷한 행위가 각 주인공에 의해 세속성과 형이상학의 대위법으로 서로를 반영한다. 결국 다 읽은 후에는 과연 어디까지 의도하고 이런 책을 쓴 건지 궁금해진달까. 

    크라이슬러는 호프만의 소설 연작인 <칼로풍의 환상 작품집>의 <크라이슬레리아나>에도 등장한다. 어쩌면 호프만의 예술적 역량의 분신이기도 하지만, 또한 브람스와 슈만의 예술 자아가 되기도 하였다. 슈만은 <크라이슬레리아나>라는 피아노곡을 작곡하기도 하면서 크라이슬러에 대한 격정을 표현하였다.

    이 책은 번역자 박은경님의 활약이 눈 부신 책이다. 자못 미사여구적 수사법의 성찬으로 끝날 수 있는 이 책을 가독성 있게 진행하였으며, 기계적이지 않은 방대한 주석은 책의 이해를 도왔다. 매주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번역자의 노고를 이야기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더불어 예전에 읽은 나츠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당시에 얼마나 신기해하면서 중간까지 읽었던가(중간에 좀 지루해져서 그만...). 소설 및 인물 설정(수고양이 무어에 미학 교수가 나온다면,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는 미학자가 나온다)을 보면서 분명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을 읽었을 일본의 대문호가 떠올랐다. 

    칼 비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소설 속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칼 비테를 어떻게 여겼을지 파악이 되었다. 지금이야 칼 비테 아버지의 교육법이 훌륭한 영재 교육법이라 여겨지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오히려 원숭이를 사상은 없지만 기술에만 능하게 키운 듯이 여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질투일 수도 있겠지만.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