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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 / 자크 아탈리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19. 1. 24. 16:58

    1. 이슬람 문명에는 나를 설레게 하는 사람이 둘 있다. 

    시대를 몇 세기나 앞선 초천재들. 

    이븐 루시드(아베로에스)와 이븐 할둔

    <깨어 있는 자들의 나라>는 이븐 루시드를 주인공으로 다룬 소설이라고 한다. 


    2. 유럽 최고의 석학?

    저자에 대한 수식어인데 그의 책을 몇 권 보았지만 도통 공감이 가지 않는 수식어였다.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펴들었다.


    이 노잼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이 두 가지.

    뭔 놈의 미스테리 비밀조직 음모론 소설, 쉽게 말하면 <다빈치 코드>류의 소설을 다섯 달에 걸쳐 읽었는지.

    더 놀라운 것은 몇 주에 한 번 꼴로 책장을 펼쳐도 무리 없이 다음 내용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이 소설 구성이 얼마나 평면적이고 단순한지 알려주는 척도가 아니겠는. '구...궁금해서 책 넘기는 걸 멈출 수가 없어!'는 무리더라도, 적어도 '앞에 뭐였더라'하며 복습할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책을 읽다가 초반에 나오는 오역 때문에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다 읽고 까줘야지(하는 못된 마음에).


    일단 주인공은 모세 마이몬이다. 우리에게는 마이모니데스로 알려진 유대인 철학자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이븐 루시드(즉, 아베로에스)는 주인공이긴 한데 뭔가 시답지 않다. 그나마 소설의 플롯은 모세가 다 가져갔고 이븐 루시드는 실체 없는 노잼 아재이다. 읽는 내내 형상화 되지 않는 이븐 루시드가 답답했다. 아니 제대로 형상화된 캐릭터가 있었던가. 

    초반에 배경이 코르도바일 때는 기분이 좋았다. 아 그랬지, 그 유태인 거리 골목 골목 참 재미있었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나고그에도 들어갔었지. 과달키비르 강. 그 다리를 건널 때 내리쬐던 햇빛이 따가웠었지. 스쳐 지나갔지만 그리운 코르도바, 또 가고 싶은 코르도바. 책을 읽고 한 곳이 더 추가되었다. 다음에는 톨레도 가야겠네.

    그런데 아쉽게도 소설적 재미가 너무 떨어진다. 지금껏 읽었던 아탈리의 책에서는 무릎을 치게하는 통찰력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필력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에 대한 지배적인 인상이라면, 아 역시 프랑스 백과전서파의 후예. 페르낭 브로델 기시감. 이규태 기시감. 옛날이었으면 혀를 내두를 만한 박람강기이지만 요즘 사람이 이렇게 쓰면 위키백과.

    백과사전 느낌 그대로 소설로 분하였다. 밋밋하고 어설프다. 미스테리 소설 특유의 두둥! 뙇! 하는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나올 수 있는 부분에서도 남산골 딸깍발이 샌님 마냥 학자연하고 고리타분하다. 

    굳이 자크 아탈리의 변을 하자면, 그가 깊이 애정하는 모세 마이문과 이븐 루시드의 사상을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자크 아탈리에게 이 둘에 대한 덕질 기운이 있음은 이미 다른 책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나도 아베로에스 빠(아빠, 읭?)로서 이븐 루시드를 오랫동안 연구한 전문가st가 소설 캐릭터를 통해 그의 사상을 어떻게 전달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fail.

    나의 이븐 루시드는 이렇지 않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맥아리가 없었다. 이븐 루시드 글을 읽으며 느꼈던 평생 학문에 몰두한 사람에게서 흘러 나오는 뭉근한 감동이 없다. 종교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어찌보면 대척점에 있는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기 위해 처절하게 고민했을 그의 절치부심이 소설의 형식을 빌리고도 나오지 않는다. 차라리 동시대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신앙과 이성의 문제에 천착하였던 아벨라르의 편지 쪼가리 한 장이 더 소설적이고 전율을 주었다.

    그럼에도 이븐 루시드의 강연 내용을 직접 받아적기도 하였다. 그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참을 받아적다보니 갑자기 괴리감이 느껴진다. 이븐 루시드에게, 이븐 할둔에게 종교는 그들이 추구하였던 합리적 사유의 방해물이다. 신앙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룬 사유의 성취는 어쩔 수 없이 신앙을 안고 가야했지만 또한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날 정도로 통시적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시대에도, 이보다 저열한 수준에서 믿음을 논하는 자들이 있는 거지. 그것도 엄청 많이. 나는 도대체 어떤 사유 공간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무신론자 놀이는 그만하고, 책 초반에 헛웃음 지었던 오류나 얘기하며 포스팅을 마치겠다(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니). 오역은 뒤에도 있었겠지만 찾아내는 데 흥미를 잃어서 그만.


    p.55

    이제 영원히 어머니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며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도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무심함에, 가슴이 저려오는 한밤중 어머니가 찾아와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   

    => 무슨 말이지. 구두점이 잘못 찍힌 듯. 


    p.67

    늙은 랍비 이븐 사디크는 친구 마이문의 어깨에 손을 딛고 일어섰다. 사람들은 모두 침묵을 지켰다.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시간은 아우구스투스력(曆) 보다 3040년, 기독교력보다 3102년 앞서 시작했습니다. 회교도의 달력도 우리보다 622년 후에나 시작했지요. 따라서 우리야말로 세계의 개척자들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아마도 오역? 일단 순서가 유대교력->아우구스투스력->서력->이슬람력이다. 그런데 이 번역대로 보면 유대교력->이슬람력->서력->아우구스투스력이 된다. 


    p.75

    다시 북서쪽으로 돌자 '유대인 성채'라는 바로크 양식의 다리가 나타났다.

    => 바로크라뇨. 바로크 양식은 16세기에 나타난다. 지금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2세기인데. 미래의 건축 양식을 아는 주인공.


    그리고 번역에서 가장 거슬렸던 것은 회교라는 표현. 가장 정확한 역어는 이슬람(안에 종교의 뜻을 내포). 정 싫으면 이슬람교이다. 회교도는 중국의 무슬림을 지칭하는 표현인데 Korean을 목포인, 진주인, 제천인으로 번역하는 꼴이다. 오랜만에 책을 들 때마다 이 역어가 매번 심기를 건드렸다.


    본격 아탈리(및 여타 관계자) 까기 포스팅을 마치는 바이다.


    코르도바 콰달키비르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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