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책]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20. 5. 13. 14:50

     

    우연히 친구가 보낸 본인의 전자책 서재 사진에서 내가 가진 것과 겹치는 책을 발견했다. 바로 움베르트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 나는 글에서 강하게 풍겨오는 강퍅한 남성 노인의 감성에 얼마 못가 책을 덮었었다. 친구는 일전에도 이미 일독하였는데, 이제와 다시 읽어보니 시대가 변하면서 공감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며 이게 수필의 한계 아니겠냐고 한다. 그러다가 여러 상황이 씨줄 날줄로 엮이면서 문득 <장미의 이름>을 같이 읽는 게 어떻냐고 내가 먼저 제안하였다. 친구는 바다와도 같은 수용성의 사람이다. 가타부타 한마디 없이 콜!을 외친다. 친구는 장미의 이름을 다 본 후 <동물학대의 사회학>을 같이 읽어보자고 하였다. 나는 방수포의 흡습성을 가진 사람이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시작은 4월 16일부터였다. 친구는 초반에는 안 읽힌다는 둥, 첫 몇 페이지는 외우겠다는 둥, 수도원 조감도 보다 눈이 빠지겠다는 둥하다가, 4월 22일에는 사람이 죽으니 재미있어졌다고 했고, 4월 27일에는 유럽 중세 수도사의 대화에 어찌하여 이리도 사자성어가 난무하는지 궁금하다고 하였다. 그 이후 스마트폰으로 책 읽다가 눈알이 빠지겠다며 리디페이퍼를 사달라고 부탁하였고, 5월 2일 다 읽었다는 메시지를 보내 나를 기함하게 하였다. 친구는 중간중간 포기하고픈 선문답들, 사건 전말의 복장 터짐, 종교의 모순, 잔인성 그리고 성직자의 천태만상이 자아낸 허무함을 얘기하였다. 마지막에는 너무 재밌어서 새벽 4시까지 읽었다고 한다. 나는 당시 윌리엄과 호르헤의 첫 대화도 안 읽었던 터라 친구에게 잠시만 기다려주십사 애걸복걸했다.

    친구는 다양한 방식으로 스포했음에도 내가 천하무적이었던 것은 중세기독교사 수업을 들으면서 이미 영화도 봤고, 간단하게 에세이도 써서 대강의 내용은 이미 알았기 때문이다. 비록 백 년 전에 본 영화이긴 했지만, 주요 내용이 기억이 안 날리 만무하다. 그러자 친구가 좀 더 디테일하게 스포 공격을 자행하였고, 뭐 거기에선 맥을 못 추긴 했다. (더 이상은 스포라 자제하겠지만, 이단 수도사의 고문에 관한 내용이었다)

    나는 원래 책을 한꺼번에 여러 권, 약 10여 권씩 보는 편인데, 내가 먼저 제안한 책을 친구가 다 읽어버리니 굉장히 초급해져서 <장미의 이름>을 집중하면서 읽기 시작하여 5월 10일에 마쳤다. 이 소설에 대한 진입장벽이 높으니 어쩌니 하는 얘기가 있었지만, 나는 전공이 전공인지라, 한자어에도 익숙하고, 중세 기독교의 이단 논쟁이니 하는 것도 여기에서 다루는 정도는 풍월로라도 알고 있다. 다만 번역 상태는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이었다. 예상치못한 진입장벽에 화가 끓어오를 지경이었다. 

    법의(法衣), 산문(山門), 도반(道伴), 고승대덕, 빈도(貧道), 학승(學僧), 법통(法統), 보시(布施)니 하는 것들을 보면서 여기가 수도원이야 절간이야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격의불교(格義佛敎) 같은 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슈퍼 긍정인의 자세). 불교도 초기에 중국으로 전래되어 경전이 번역되던 시기에는 고유 개념을 당시 사람들이 익숙한 도가나 유가의 개념 틀 안에 맞춰 번역하였다. 사실 기독교가 처음 동양에 전파될 때에도 그 역어는 결국 불교에서 차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이건 해도 너무하다. 내가 처음 영어 번역판을 찾은 것이 바로 조복(調伏)이라는 단어를 접하고였다. 조복의 뜻은 (1)  『불교』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하여 여러 가지 악행을 굴복시킴. (2) 『불교』 부처에게 기도하여 부처의 힘으로 원수나 악마를 굴복시킴이다[우리말대사전]. 난 처음에는 엑소시즘을 번역한 것일까, 그렇다면 천주교에서는 구마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굳이 조복 같은 단어를 써야 하나 하면서 영역본을 뒤적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cure에 대한 번역으로 조복을 사용한 것이다.

    "나는 우연히 약 만드는 데 대단히 재주 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 양반은 단기간에 질병을 조복(調伏)시킬만한 단방 영약을 만들어 내는 사람입니다.
    "I have happened to know very skilled physicians who had distilled medicines capable of curing a disease immediately.

    단방 영약은 언급하고 싶지도 않다.

    "과언(過言)은 죄가 될 수 있습니다만 과언(寡言) 또한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못합니다."라는 문장도 거슬렸다. 제 딴에는 라임 쥑이네 했겠지만 이 두 과언은 상반된 의미도 아니고 내용 상 오역이다. 과언(過言)은 말의 정도가 지나친 것이다. 내용상 전자는 다변(수다, excess of loquacity)이고 후자는 과묵(excess of reticence)이 적확하다. 이 과묵과 다변은 이 수도원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모토인데 이것을 이렇게 라임만 맞춰서 번역했다. "말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이지만, 말이 너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라고 번역하면 화려함을 추구하는 역자의 성에는 안 차겠지만 오역의 굴레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무릎이 귀를 넘는 노인"이라는 부분에서 대폭발해서 드디어 이탈리아어 원본을 찾아보았다. 그런 말 없이 그냥 '노인'이었다. 이상의 단편소설 <종생기>에 '무릎이 귀를 넘는 해골'이라는 말이 있는데 역자는 이걸 써먹고 싶어 안달이 났나 보다. 참고로 여기에서 무릎이 귀를 넘는 꼬부랑 할아버지 역의 호르헤는 처음 등장에서 허리는 굽었지만 사지가 강건해 보인다고 묘사되었다. 

    이때부터 다 때려잡겠다며 이탈리아어와 영어판을 모두 들고 읽기 시작했다. 번역자가 제 흥에 겨워 소설을 쓴 내용이 수두룩하다. 중간 중간 나혼자 번역을 고쳐보기도 했지만, 너무 진도가 안 나가고, 어느 순간 이야기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그냥 한국어판으로만 봤는데, 그렇다고 내 분노가 사그라든 것은 아니다. 툭하면 나오는 '낫우다' 어쩔. 문법적으로 잘못된 피동 표현이 이것 외에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표준어 규정> 제3장 제5절 제25항 “의미가 똑같은 형태가 몇 가지 있을 경우, 그중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널리 쓰이면, 그 단어만을 표준어로 삼는다.”라는 규정에 따라 ‘고치다’만을 표준어로 인정하고 ‘낫우다’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윤기 특유의 좋게 말하면 고아(古雅)한 문체, 나쁘게 말하면 구닥다리 만연체를 보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떠올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소 엄청난 학식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이었는데, 처음 성경을 접하면서 논리적 모순은 물론이요, 저급하고 조야한 문체에 굉장히 당혹스러웠다고 한다. 이런 악문(惡文)이 과연 진리의 말씀을 적은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합리적인 의구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식자층이 가짐직할 이런 식의 의문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것인지 우리나라 성경 번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문법이 파괴된 예스러운 만연체를 자랑한다. 라틴어 성경의 조야함을 괴팍한 번역으로 뛰어넘으려는 시도라면 이해가 가지만, <장미의 이름>은 굳이 몸부림치지 않아도 꽤 고아(高雅)한 문장을 탑재하지 않았는가.

    많이 양보하자면, 역자의 한자어 오남용은 (다시금 강조하건대, 남용뿐만 아니라 오용도 있다) 어쩌면 이 책의 원본과 번역본의 독서 난이도를 맞추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서구권의 독자들에게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툭하면 튀어나오는 라틴어 문장을 번역하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 식자층에게 이 정도 라틴어는 교양이라고 생각한 듯싶다. 역자는 한국 독자가 그 정도로 라틴어 교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아마 한문이었으면 그대로 썼을지도) 라틴어 번역은 촘촘히 했지만 그 대신... 여기까지 하겠다. 다만 현대에는 현대에 맞는 번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영어/일본어 중역본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뿐만 아니다. 도대체 몇 쇄가 팔린 책인데 아직도 구두점이 이 따위로 찍혀있는지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발목 잡는 번역을 뿌리치며, 책의 본의를 (스포 없이) 간단하게 파악하자면, 요한 계시록과 맞물려 7일간 지속되는 1327년 어느 날 수도원의 살인사건 이야기이다. 유럽 최대의 장서를 보유한 베네딕토회 수도원의 비밀을 파헤치게 된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당시 유럽 지역을 휩쓸던 이단 논쟁과 그에 대한 박해, 각 교단 별 힘겨루기, 한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교황과 황제의 속권 논쟁, 역시 한물갔지만 계속되는 신앙과 이성에 대한 논쟁, 비블리오필리아들의 책에 대한 사랑, 그리고 수도사의 삶 속에 피어나는 복합적 감정과 천태만상이 이 책의 주제이다. 사실 책에 대한 설명은 후기에서 강유원 씨가 너무나도 잘 설명해놨다.

    소설의 배경은 1327년인데, 이를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 재림과 관련된 천년으로 엮어간다. 새로운 천년은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죽음으로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죽은 지 300년 이후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기독교 지배로부터 천년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고 보면 불교에서도 부처의 입멸 후 올바른 가르침이 지켜지던 정법시대 500년, 비슷한 교법이 행해지던 상법시대 1000년, 그리고 세상이 혼탁해지는 말법시대 만년을 이야기하던 것이 떠오른다. 저 기적의 셈법만큼 우습긴 하지만, 나름대로는 총 22장으로 구성된 요한 묵시록과 당시 카톨릭 세계를 지배하던 적 그리스도의 인상을 풍기는 교황 요한 22세의 관계도 잠깐 생각해보았다.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요한 묵시록이 맥거핀이었다는 사실이다. 책 전체를 아우르는 최대 규모의 맥거핀이 있냐고 혹여나 그대 묻는다면, 나는 손가락을 들어 바로 <장미의 이름>의 요한 계시록을 가리키리라.

    이 책을 보면서 그간 중세기독교사를 공부하며 접했던, 교리와 현상으로 형해화된 종교집단이 아닌, 생생한 움직임을 가진 사람의 형체가 잡혔다. 이단 논쟁의 이론은 알았는데 그 안의 알력은 저렇게 역겨운 방식을 품고 있었겠구나, 단체생활을 하는 수도사의 마음은 저렇게 안팎이 호동하였겠구나, 글로 박제된 시죄법이나 이단 박해는 저리도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었겠구나 하고 말이다. 움베르트 에코는 학문의 틈바구니에서 생명력을 잃어가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거둬 올려 생명력을 불어넣는 데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움베르트 에코가 말도 안 되게 지난하게 묘사하는 대상물의 형태 얘기가 지루했지만(끝까지 지루했다), 어느 순간 반성하였다(반성하면서도 욕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각 사물의 명칭을 익히는 데에 너무 게을렀다. 세세한 과일 명칭을 익히는데 게을러 다디단 과일이라고 통칭하고, 흐드러지게 핀 꽃이며 푸릇한 초목에 대한 명칭을 몰라 그저 꽃과 풀과 나무라고 일컫는다. 바다에서 나오는 온갖 해산물의 이름도 몰라 물고기와 해초, 혹은 내가 잘 안 먹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신체부위의 명칭도 제대로 몰라 그저 몸통과 사지라고 표현한다. 결국 사물에 대한 이해는 얼마나 많은 단어를 채집했는가에서 비롯되지 않겠는가.

    잠시나마 중세의 긴 터널 속을 헤매다가 빠져나온 기분이다. 친구와 다음에는 움베르트 에코의 다른 책을 읽기로 하였다(가 번역자에 관한 후기들을 보며 조금만 더 생각해 보기로 했다. 왜 출판사는 그 이름과 가는 길이 이다지도 다르단 말인가. 책들이 다 닫혔다. 게다가 움베르트 에코 책은 다 독점하고).

    책 자체도 재밌고 익힌 바와 깨달은 바도 많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감사했던 것은, 같이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책 속 문장들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낄낄거릴 수 있는 친구가 강산이 두 번이 넘게(조만간 세 번 넘게) 변하도록 함께 한다는 점이다. 이 어찌 큰 복이 아니겠는가.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갔던 아씨시가 떠올랐다. 여기는 성 프란치스코의 유골이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 굉장히 아름답고 경건한 성당이다. 아씨시에는 산타 키아라의 성당도 있는데, 여기에 있는 성녀 키아라의 유해를 맞닥뜨리고 흐억 하고 비명을 질렀던 기억이 ㅋㅋㅋ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