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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완충구역의 상실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16. 7. 14. 15:56

    한때 디씨라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익명이라는 방패 덕분에 자유로운 생각과 풍자도 넘치지만 그곳을 지배하는 정서는 양극단의 감정이다. 싫다는 표현을 위해 욕과 벌레로도 부족하여 '극혐'을 사용하고, 쓰레기를 더하고, 생식기를 더한다. 여기에 온갖 성, 민족, 외모, 지역을 차별하고 비하하는 언어가 변주되어 하나의 싫어하는 감정을 연주한다. 좋다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종교성을 소환한다. 종교의 거룩함이나 신성함을 띠는 다양한 합성어만이 좋다는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듯 싶다. 감정의 양극단을 충만하게 표현하기 위해 동원되는 언어의 향연은 마치 자석 양극에 어지럽게 모인 철가루 같다. 평온함이나 일상적인 감정은 발 디딜 틈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지루할 뿐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문화의 각 분야, 우리가 흔히 장르라고 부르는 것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각각의 장르에는 그것이 담고 있는 표상의 층차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우열을 논하기 어렵지만 그 와중에도 어쩔 수 없는 우열이 있지 않을까 한다. 무엇을 표상하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표상의 방법에 따라서 말이다. 완충구역, 즉 버퍼존의 존재 여부를 말하는 것이다. 


    나도 한 때 굉장히 즐겼고, 앞으로 언제라도 즐길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 소위 '장르문학'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장르문학과 소설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한다면 바로 버퍼존의 존재 여부일 것이다. 장르문학에는 일상의 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스파크가 터지듯 강렬하다. 양극단의 감성 사이를 마치 양자도약이라도 하듯 궤적을 남기지 않은 채 진동한다. 그에 비해 소설, 굳이 지칭하자면 순수문학은, 일상의 감정 혹은 평온함, 혹은 지루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버퍼존을 가운데에 두고 완급조절을 한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즐겨 들었던 Escala의 데뷔 앨범은 앨범 전체에 절정밖에 없다. 에스칼라 앨범에서 감정이 절제되는 순간은 곡에서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침묵 뿐이다. 고전음악이 도입, 전개, 절정을 사이에 두고 다양한 변주를 하며 완급조절을 한다면, Escala의 음악, 그리고 요즘 대중음악은 심지어 간주의 시간조차 아까워 한다. 이렇듯 어떤 문화 영역은 감정의 과잉과 자극을 전면에 배치한다. 일말의 버퍼존의 여지를 두지 않은 채로.

      

    가끔 궁금할 때가 있다. 이런 식의 양극단의 감정만 존재하는 문화 분야나 커뮤니티가 현재의 특징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역사 이래로 언제나 존재해왔던 것일까. 많은 기성세대가 요즘이 훨씬 극단적이라고 생각하는 듯 싶고, 나도 예전에 비해 지금 더 극단성이 활개를 친다고 생각하지만 설마 예전이라고 저런 식의 버퍼존이 상실된 장르나 공동체가 없었겠는가. 어쩌면 이는 양극단의 감정만 가지는 장르가 버퍼존을 가진 다른 장르에 비해 영속성이 상대적으로 짧아서 생기는 오해가 아닐는지. 


    벤야민의 저작도 어쩌면 이런 류(버퍼존 상실류)가 아닐까라고 말하면 분개하는 사람이 많으려나. 발터 벤야민의 글이라고는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일방통행로> 밖에 읽어보지 못하고 논문이라 할 것은 전혀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일 수 있지만 말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의 편린에 대한 기록이 요즘의 sns나 디씨감성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양 속에 질이 있다 하지 않는가. 디씨 글 중에 명언 나올 수 있고, 장르문학 중에 세계명작 나올 수 있고, 대중음악 중에 클래식 되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딱히 완충구역의 유무로 장르나 집단의 우열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열등해도 아름답고 열등해도 올바를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완충구역이 상실된 영역은 날 지루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지치게는 만든다. 

    밖에서 숨고르기 하고 다시 또 즐길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안 올 수도 있겠지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