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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무 졸린나머지 그만 (feat. 청결, 알러지)
    What am I doing? 2020. 7. 16. 16:36

    얼마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들이 있다. <청결의 역습>이니 <우리는 얼마나 깨끗한가>가 등.

    나(가벼운 결벽증 증세)와는 너무나도 다른 타인의 위생관념을 이해하고자 도서관에서 '청결'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한 건데 걸려든 책이다. 내용은 제목처럼 너무 청결한 것이 문제라는 것.

    <청결의 역습>은 서문부터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마침 <그리스도교 사상사>라는 제하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 읽다가 <청결의 역습>을 읽으니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보다가 <해리포터> 보는 기분이었다. (둘 다 본 적은 없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책이 있다니! 페이지가 팍팍 넘어간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에는 아토피에 시달리는 사랑하는 조카를 생각하며 읽었다. 어려서의 아토피가 비염에서 천식으로 악화되어가는 얘기를 보며 수심이 깊어만 갔다. 조카를 기생충에 노출시켜야 하나, 연못 물을 떠먹여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자가면역질환이라니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병인가. 

    그러다가 생활에 치여 이 책을 손에서 잠시 놓은 사이에 갑자기 내 몸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알레르기라고는 재채기를 쒸원하게 하는 먼지 알레르기밖에 없던 내게 이상 신호가 감지된 것이다. 처음에는 왼쪽 팔뚝부터 강한 가려움을 동반한 두드러기가 시작되다니, 점차 오른쪽 팔, 목, 어깨, 귀, 그리고 다리로 퍼져갔다. 너무 가려워서 하루 종일 긁고,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매번 벅벅 긁다가 새벽에 눈을 뜨면 꼭 3시 20분이었다. 밤새 긁다가 늦게 잠이 들어서 일상생활의 리듬이 깨질 정도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긁는 곳마다 멍까지 들었다. 

    내게 두드러기는 "정말 정치인이라면 두드러기가 난다"와 같이 지극히 수사적인 표현으로나 쓰는 말이었다. 가려움에 잠도 못 이룰 때면 세조가 생각이 났다(아플 때면 비슷한 증상을 겪은 역사상의 인물이 떠오르곤 한다). 이 사람은 말년에 심각한 피부병에 시달렸는데 너무 가려운 나머지 칼로 긁고 싶을 정도였다나 뭐래나. 혹자는 세조에 대해 한센병을 이야기하지만 한센병은 오히려 감각을 둔하게 하는 쪽이기 때문에 지독한 소양증이었을 듯싶다. 세조는 죄 없는 조카를 죽여 벌을 받은 것이라 하지만, 조카 바보인 나는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가려움증으로 약 2주일을 시달리니 병원을 가야 할 것 같았다. 분명 처방이라고 해봤자 항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 연고를 해줄텐데 차라리 <청결의 역습>에 나온 것처럼 다양한 미생물에 노출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스터디 중 한 친구의 지인 얘기를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 지인은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를 갖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국소부위의 소양증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점차 악화되어 알레르기 쇼크로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겁이 덜컥 나서 스터디가 끝나자마자 룰루랄라 피부과에 갔다. 피부과 의사는 피부과 의사답게 피부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바로 항히스타민제와 스테로이드 연고를 처방해줬다. 이 항히스타민제는 잠이 많이 올 수 있다고 했는데 난 좋다고 했다. 밤에 잠을 너무 못 자서 힘들었기 때문이다.

    처방받은 약을 받지 않고 이틀을 더 보습만으로 버텼다. 깨나 있을 때는 괜찮은데, 밤에 잠을 자려고 하면 격한 가려움으로 수면을 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약을 지어왔다. 

    나의 인생은 코로나 전과 코로나 후, 아니 항히스타민제를 먹기 전과 먹은 후로 나뉜다. 어떻게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가려움이 사라질 수가 있는가. 도대체 같은 몸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약을 먹은 후에 벌어졌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엄청나게 졸립다. 약간 술 취한 것처럼 졸리다. 레보세티리진 성분의 약을 먹고 있는데 누워서 잠 자고 싶은 생각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특히 더 정신이 없어서 어디 부딪칠 때도 있고, 듀오링고를 풀다가 손이 미끄러져 다른 답을 누르기도 한다. 

    그렇다면 내 알레르기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밤새 긁다가 잠에서 깨면, 나는 가려움증에 관한 여러 가지 검색을 했다. 무엇 때문에 알레르기가, 두드러기가 호발 되었을지 음식물을 추적해 보면 대충 두 가지가 나온다. 하나는 유산균이고, 다른 하나는 레몬 향이 들어간 탄산수이다. 원래 먹던 유산균 외에 사람들의 추천으로 한번 구입해 본 유산균을 며칠 복용했었고, 원래 탄산수는 플레인 맛만 마시는데 레몬 맛으로 잘못 산 것이 하나 있었다. 둘 다 가려움증이 시작되자마자 멈췄다. 그리고 이 유산균을 복용한 사람 중에 나와 비슷한 피부 부위에 소양증이 생겼다고 호소하는 글을 넷상에서 몇 개 발견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유산균이 평생 알레르기를 모르고 살던 내 장내세균총에 민감성을 준 요소가 아닐까 싶다(약 80%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독한 소양증 덕분에 약을 처방하지 않고 오로지 보습과 쇠비름 물, 그리고 음식을 조심하는 정도로 아토피를 이겨내는 조카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지금껏 조카에게 약을 쓰는 것을 반대했던 것은 항히스타민제나 스테로이드 연고 같은 대증적 치료로 자가면역질환을 미봉책으로 막다가 오히려 장기적으로 몸에 이상이 올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성인이니 이런 가려움증에 시달리느니 혹여 부작용이 있을지라도 대증적으로라도 치료해서 평안하게 잠을 자고 싶다는 등의 선택을 할 수 있는데, 조카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지독한 가려움을 참으라고만 한다. 내가 못 참겠는데, 남에게 참으라고 하는 것도 참 못할 짓이다. 조카에게도 맞는 항히스타민제 등을 쓰도록 부모를 설득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보다 더 <청결의 역습>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다양한 미생물에 노출이 되어야겠다. 난 너무 청결만을 생각하며 지독한 현대인으로 살아왔다. 주말에는 조카와 함께 주말농장에라도 나가 미생물들과 한판 신나게 놀아봐야겠다.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