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책]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잡설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22. 3. 2. 18:10

    친구와 매년 대작 한 편씩 읽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20년에는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었고, 2021년에는 나는 <신곡>을 읽자고 하였고, 친구는 그러면 지옥편만 보자고 하였다. 내가 그런 게 어디 있냐 끝까지 다 읽어야지 하니 친구는 그러마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에 좀 읽어보던 내가 먼저 다른 책을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 했다. 마침 당시에 조지 스타이너의 <톨스토이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인가>라는 평론서를 재밌게 읽던 차였다. 다만 책을 읽는 내내 절름발이 오리가 된 느낌이었다. 톨스토이 책은 몇 권 읽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를 딱히 읽은 기억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좀 제대로 읽고 다시 이 평론서를 읽으면 어떨까 싶었다. 친구는 오케이 했고, 최종 결정된 책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죄와 벌>, <지하로부터의 수기> 등을 고려하다가 별안간 정해졌다. 원래 장고 끝에 악수, 아니 확 저지르기 아닌가.

    이게 2021년 3월 초순의 이야기이다. 전자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판본으로 체크하다가 김희숙 씨가 번역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최종 안착했다. 3권으로 이루어졌는데 표현이 풍부해서 생생함이 문체 가득 묻어난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어서 그야말로 흠뻑 빠져서 읽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천하의 이야기꾼이다. 주요 내용과 전혀 상관 없는 서사가 계속되는데도 나는 거기에 끌려가서 허우적대곤 했다. 특히 아버지 카라마조프,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에 대한 묘사에 욕지기가 나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딱히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세상에 이토록 개탄스러운 인간쓰레기가 또 있을까.

    즐겁게 독서를 하던 차에 한눈을 팔기 시작했다. 바로 comprehensible input이라고 하여 외국어 익히는 방식인데, 이 일환으로 각종 외국어로 독서하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많은 책을 한꺼번에 읽기 시작한데다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영어로 읽었고(러시아 어는 못하니까), 그러다 보니 살짝 흥미를 잃었다. 1권을 8월에 다 읽고 2권 초반의 썩는 냄새라는 부분에서 지박령이 걸려 그대로 몇 달을 멈추었다. 설상가상, 몇 년 만에 온 중드 덕질 기간의 도래와 맞물려, 러시아 출신, 세계의 대문호는 뒷방 노인네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오호통재라!

    그렇게 해를 넘겼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1월말부터 회심하였다. 하루 두 챕터 이상씩 꾸준히 달렸고 2월 26일에 드디어 작가 해제까지 완독 하였다. 원래 책을 오랜만에 읽으면 스토리도 기억이 잘 안 나는데다가, 러시아 작품은 등장인물 이름이 장애물이라 재진입하기가 어려운데, 이 책은 워낙 주제 선율이 뚜렷하고, 자주 등장하는 악기는 제한되어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재미 측면에서 2권은 정말 곤욕스러울 정도라서, 친구와의 약속이 아니었으면 이 책에게는 아쉬운 작별을 고했을 듯싶다. 그런데 3권은 정말 대단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기시감을 불러온 콜랴 이야기, 지금껏 봤던 법정 영화 중 가장 큰 전율을 불러일으켰던 어퓨굿맨을 떠올리게 한 [오심]. 덕분에 3권은 꽤 집중해서 일주일도 걸리지 않아 다 읽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5편 PRO와 CONTRA의 반역, 대심문관, 제12편 오심의 검사의 논고부터 사상의 간통자까지 다시 읽어보겠다.

    완독 사실을 친구에게 보고하면서 맨 처음 한 말은 다음에는 짧은 책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친구의 어떘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래의 짤.

    거의 만 1년을 소진하여 읽은 책에게 치얼스.

    다음에는 뭘 읽을까.

    요즘 너무 문학책을 많이 읽는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