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술회전 재탕하다가What am I doing? 2022. 5. 7. 12:54
약간 흐름이라는 게 있다.
중드는 한번 들어가면 다른 것은 다 제쳐두고 달리게 하는 마약 같은 맛이 있다.
미드는 약간 생활 같다. 그냥 부담 없이 켜놓는다. <Frasier>, <The Big Bang Theory>, 그리고 요즘은 <Gilmore Girls>를 그냥 생활처럼 켜 둔다. 가끔 진득하니 자리 잡고 볼 때도 있지만, 보통은 그저 배경음악처럼 떠들게 내버려 둔다.
일드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안 본다. 유일하게 부담없이 보는 것이 <고독한 미식가>. 일본은 드라마보다는 애니메이션 쪽이다. 재탕에 삼탕에 사골 국 마냥 우려먹는 것이 있으니 <십이국기>, <충사>, <정령의 수호자>이고 상대적으로 최근에 본 작품은 한번 보면 끝이다.
중드기의 도래와 함께 일드와 아니메가 버림 받고 덩달아 일본어가 홀시된 지 꽤 오래이다. 그래서 중드도 약간 쉬어가는 타임이고, 일본어 시동이나 걸 겸 작년 초에 재밌게 봤던 <주술회전>을 꺼냈다. 당시에는 뒷내용이 궁금해서 만화책을 찾아보기도 하고, 오프닝과 엔딩을 좋아해서 플레이리스트에 항상 올려두었다.
그런데 3화를 보고 4화 예고편을 보는데 느낌이 싸하다. 내가 <주술회전>을 보다가 소년만화에서 이런 게 가당키나 하냐며 잔학성에 치를 떨었던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게 이 에피소드였던 것 같아서다.
재탕을 하다보면 이미 알고 있는 두려운 장면에 시청 속도가 현저히 느려지는 경우, 혹은 그 벽을 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 재탕을 수차례 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랑야방>의 소경예 생일잔치가 다가오니 불안증에 시달렸고, <산하령>은 주자서는 하늘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며 좌절했는데 남들은 하하호호하며 술 마시는 장면을 넘기 힘들다. 이걸 넘어도 아상의 결혼식 ㄷㄷㄷ. <주술회전>은 첫 재탕인데 이렇게 초반일 줄이야. 벌써부터 PTSD가.
<주술회전>을 보다 보니 그전에 (무려 2013년) 시청한 아니메가 기억났다. 제목조차 기억이 안 나고 키워드 조차 가물가물해서 머리를 쥐어짜며 검색. 막부 말이고, 교토 배경이고, 낭인이나 신선조 느낌이었는데 잘 안 나온다. 게임 원작이었던 것도 기억나고, 마지막으로 생각난 것이 흡혈귀. 그랬더니 나오는 것이 <박앵귀>. 살펴보다가 이게 이런 내용이었다고? 하며 다시금 놀라고. ㅋㅋㅋ
안 그래도 교토 니조 조에 '대정봉환'의 현장을 재현해놓은 것을 보고 울컥했던 것을 친구는 '일본인도 공감 못할 감성'이라며 비웃었는데 말이다. 실상은 행복한 M&A일수도 있고, 타국의 정치권력에 일말의 감정이 있어서도 아니지만, 그저 망국의 배에 타서 탈출도 못하는 자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있을 뿐이다. 비잔틴 함락의 마지막 날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시민들을 생각해도 슬프고, 수많은 망국의 이야기를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아프다. 오늘 오랜만에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형가에 대한 글을 봤는데 지금의 나는 감정이입이 안 되지만, 그가 협객으로 이렇게 이름을 떨치고 인구에 회자되는 것도 망국의 끈을 놓지 않는 연민이 보편적이라 그런 것 아닐까.반응형'What am I do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Nulla dies sine linea - 손에 못이 박이다 (0) 2022.05.10 Nulla dies sine linea (0) 2022.05.05 Nulla dies sine linea - 难留少年时 (0) 2022.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