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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가라타니 고진의 『헌법의 무의식』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25. 4. 6. 22:20

    가라타니 고진의 『헌법의 무의식』

    내게는 좋아하는 철학자 본진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 발터 벤야민, 아베로에스, 이븐 칼둔 등이 그들이다. 세상에 많고도 많은 것이 철학자다 보니 본진을 뒤로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이번에 다시 회귀했다. 그리하여 읽게 된 것이 『헌법의 무의식』.

    가라타니 고진은 이 책에서 철학자로서는 굉장히 쉬운 언어로 일본 헌법9조에 담긴 의미, 무의식 등을 분석한다. 나는 처음 제목을 접하고, 보편적 의미의 헌법을 이야기한다고 여기고 펴들었는데, 알고보니 일본 헌법9조를 분석한 책이었다. 한국의 헌법9조도 모르는데, 일본의 헌법9조를 알 턱이 있는가. 그래서 급히 구글의 힘을 빌렸다. 정확히 말하면 나무위키.

     

    第九條 日本國民は、正義と秩序を基調とする國際平󠄁和を誠實に希求し、國權の發動たる戰爭と、武力による威嚇又は武力の行使は、國際紛󠄁爭を解決する手段としては、永久にこれを放棄する。
    前󠄁項の目的を達󠄁するため、陸海空軍その他の戰力は、これを保持しない。國の交戰權は、これを認󠄁めない。
    제9조 일본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이 발동되는 전쟁이나 무력에 의한 위협,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써는 영구히 방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해공군, 그 밖의 전력은 유지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

     

    내용을 보니 아는 조항이었다. 일본 헌법을 '평화헌법'인 척 둔갑하게 한 조항이다. 덕분에 일본은 병력을 보유할 수 없다. 물론 자위대라는 이름으로 군비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자위대가 한국에 파견되는지도 몰랐다. 일본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는 친구가 한국 파견을 준비하는 자위대를 가르친다는 얘기를 듣기 전에는 말이다. 

    이 책은 크게 네 장으로 나뉜다. 제1장 헌법의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제2장 헌법의 선행형태, 제3장 칸트의 평화론, 제4장 신자유주의와 전쟁이 그것이다.  

    제1장과 제2장은 주로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기본으로 헌법9조가 영속할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을 제시한다. 제1장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차용한 무의식, 죽음충동, 초자아 개념을 통해 헌법이 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규범과 그것이 억압하거나 감추는 구조적 모순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결국 헌법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놓인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평화헌법이 반세기 넘게 유지된 이유를 "과거 외부로 향했던 공격본능이 내부로 향함으로써 만들어진 문화"라고 설명한다. 이는 일본 사회가 전후 평화의 가치를 내면화했으며, 이러한 문화적 변화가 헌법의 지속성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제2장에서는 '건축의 선행형태'라는 굉장히 독특한 개념을 통해 평화헌법의 조항이 역사적, 내재적으로 이미 일본에 존재했음을, 즉 일본의 평화주의 맹아론을 주장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직접적으로 프로이트의 이론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프로이트의 <신비로운 글쓰기 판>에서 우리 마음의 작동원리가 일상적으로는 잊었다고 느끼지만, 무의식적 흔적(trace)으로 남아있으며 이를 재구성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과정임을 밝힌 내용을 상기시킨다.  

    제3장에서는 칸트의 평화론을 중심으로 헌법의 이상적 토대로 삼아 분석한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국가간의 평화가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국가 간의 상호 존중과 협력에 기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제법이 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칸트는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로 보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평화 상태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평화는 우연히 이루어지지 않으며, 의도적으로 구축해야 하는 상태라는 것이다. 

    제4장에서는 교환양식을 헌법 분석에 적용한다. 사회 구성체를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이 아닌 교환양식(mode of exchange)으로 분류하는 것은 이미 다른 책에서도 그가 굉장히 공을 들여 설명한 이론으로  이 책에서는 헌법을 권력 교환 양식(B양식)과 자본주의 상품 교환 양식(C양식)이 결합된 결과물로 본다.  즉, 헌법이 자본-네이션(nation)-국가의 삼각 구도를 유지하는 상징적 장치임을 강조하며, 이를 해체하려면 D양식, 즉 초월적 교환, 보편종교와 같은 단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바로 이 헌법9조의 평화 조항이 그런 형태를 대변한다고 밝힌다.  

    1장과 2장은 내용이 어느 정도 연결되는데, 3장과 4장이 각각 다른 책에서도 언급된 이론을 주도면밀하게 설명하다가 갑자기 헌법9조 이야기로 마무리 짓는다. 1장의 무의식 이야기와 전혀 관련 없는 소리, 즉 교환양식에 대한 이야기, 제국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결론은 언제나 헌법9조의 무의식으로 회귀하는 듯한 이상한 구조에 도대체 이 아저씨 왜 이러는 거지하며 실망스러움을 금치 못하였다. 나중에 후기를 보고 몇몇 별도의 주제로 진행된 강연을 하나의 책으로 묶어내려다 이런 분절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이론은 독창적이지만, 자생적논리구조에 끼워맞추기 식이 계속 되면서(제3, 4장) 여러모로 아쉬운 저작이 되었다. 

    번역도 살짝 아쉽다. 가라타니 고진을 열심히 번역하는 번역가가 몇 명 있고, 그 중에서도 이 책의 역자는 굉장히 정력적으로 그의 저작을 번역하는 사람이다. 덕분에 가라타니 고진의 저작을 쉽게 접할 수 있으니 그 노고가 굉장히 고맙다. 다만, 일본어 번역서적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하다만 번역, 예를 들어 일본식 한자 어휘를 그대로 쓴 표현이나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쓴 영어 외래어를 볼 때마다 역자의 성실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다. 더불어 선택한 역어도 내용을 이해했다면 이렇게 썼을까 하는 것이 종종 등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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