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wore never to be silent whenever and wherever human beings endure suffering and humiliation. Neutrality helps the oppressor, never the victim. Silence encourages the tormentor, never the tormented.
- Elie Wiesel Nobel Prize Acceptance Speech, Oslo,
에세이는 거의 읽지 않는 편이지만, 가끔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사전지식과 아우러져서 그에 대한 평가에 드리워지기 마련인데, 김훈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사전 지식이 거의 전무하였다. 그의 소설을 읽은 적도 없고, 그에 대한 평가는『칼의 노래』라는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절 기자 출신 작가로 간결체를 주로 쓴다는 정보 정도였다. 내가 평소 읽지 않는 책들을 읽게 되는 독서모임에서 정하였고, 덕분에 그의 글을 에세이로나마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김훈의 글에는 비트겐슈타인 청년 시절의 언어관, 즉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철학이 엿보인다. 하지만 그는 작가이기에 그 경계를 넘나든다. 때로는 이 언어관이 증폭되어 백마비마론(백마는 비마가 아니다) 같은 논리로 출몰한다. 그의 글이 단순한 서사를 넘어 깊은 사유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작가답게 언어에 대한 설명들, 특히 조사 에와 형용사와 부사 이야기 등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말에 대해서 항시 고민해야 하는 기자와 작가라는 직업덕분인지 문법에 대한 사유도 치밀함이 느껴졌다.
백골로 진토되는 이미지가 여러 번 재연된다. 그는 어느새 주변인의 죽음에 자주 노출되고, 그래서 더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는 나이가 되었다. 이렇듯 그는 죽음을 일상화하며 서랍 안 물건까지 비운다. 가끔 추억이 있는 물건들도 그는 죽은 후의 자신에게는 필요 없다며 치울 생각을 한다. 그만큼 일상화된 죽음은 아니지만, 나도 예기치못한 나의 사멸을 떠올리면서도 추억이 담긴 물건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현재의 내가 귀히 여기는 물건을 예기치못한 죽음을 예상하며 치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소중한 친구는 자신이 죽으면 그녀가 쓴 일기를 즉시 소각해달라고 부탁했다. 알겠다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따로 보관할 생각이다. 내가 읽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보관할 생각을 하는 이유를 나 스스로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단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그 일기를 담아놓은 상자 자체가 친구를 그리워 하는 내 마음의 표상일 수 있어서일까.
'세월호의 x래싱'과 피난하던 엄마가 묶은 'x자 포대기'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순간을 표현했을 때 전율이 일었다. 재난의 순간, 인간이 얼마나 진심을 담았는가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그 순간 조금이라도 더 인간의 마음을 담았더라면 그리도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겠는가. 그런 고민이 있는 사람이기에 "경영자는 언론을 통해 중대재해처벌법 어렵다고 얘기하는데 말하는 사람들의 말하는 범위 안에서 맞다. 나는 그 범위 밖을 말하려 한다."(121쪽)이라고 말할 때의 준엄함에 소스라친다. 현대법을 배태한 서양적 법의 영역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데, 진정 고민해야 할 부분은 바로 법으로 규정하는 영역 밖의 문제이다.
작가는 파주를 아지트 삼았는지라, 국립민속박물관 파주 수장고와 그곳의 유물도 언급하였다. 마침 나도 최근에 가보고 개방형 수장고 방식이 굉장히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은 어린 딸의 소꿉장난 세트였다. 딸은 출가외인이라며 대충 키울 것도 같은 시대에 도자기로 하나하나 구워만든 귀여운 소꿉놀이 장난감 세트에서 뭐랄까, 기록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실체로 남은 딸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 묘하게 감동적이랄까.
에세이집을 보면서 아빠가 많이 생각났다. 작가와 비슷한 나이대인 아빠가 겪었을 격동의 세계에 대한 이해랄까. 아빠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글을 통한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