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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극] '죽림애전기(竹林愛傳奇)' 국립극장 9월 13일(토) 3시 공연오덕기(五德記)/음악_공연 2025. 9. 15. 16:47

이제는 친구라고 불러도 될만한 전 직장동료가 추천해 줬다. 내가 쿄겐 얘기를 하면서 일본에 갈 때마다 기회가 없어서 못 봤다고 하자 마친 우리나라 국립극장에서 동북아시아 3국의 창극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본인은 중국의 창극도 본다고 하길래 친구와 헤어져 집에 오는 길에 급히 표를 예매했다. 바로 '죽림애전기'와 '노가쿠'였다.
국립극장으로 향하는 길에 공연 정보를 훑어보니 죽림애전기는 죽림칠현의 후손의 사랑과 뭐 기타 이야기를 다룬 광동오페라라고 쓰여있다. 그럼 월극(粵劇)인 건가, 아니면 경극을 광동 지역에서 하는 건가 무언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내 자리를 찾아 자리를 하니 스크린에 'cantonese opera'라고 확실히 쓰여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월극이라는 말을 모를까 봐 이렇게 광동오페라라고 쓴 걸까. 가기 전에 정보를 좀 찾아봤으면 좋았을 텐데 바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하고, 남들 이야기의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아 막무가내 같은 마음으로 갔는데. 월극이다. 그럼 공연 언어는 광둥어인가라고 고민하면서 밖에 나와보니 공연을 보러 온 중국인 단체관광객이 보인다. 그들 옆을 지나가니 너무나도 확연하게 광둥어를 쓰더라. 그때 든 생각은 자막을 열심히 봐야겠구나.
자리는 무대에서 세 번째 자리였는데, 자막을 보려면 열심히 눈을 굴려야 했다. 이 눈 굴리는 게 사람을 꽤나 졸립게 만든다. 요즘 수면도 부족한 편이라 마음만 먹으면 퍼져 잘 수도 있는 환경이었다.
경극도 본 적이 별로 없지만(cctv 방송이나 막간 공연 정도가 다이다), 월극은 아예 처음이라 이들의 공연 수준을 판별하기 어렵지만 대강의 기운은 느껴진다. 분명 더 잘하는 극단이 있으리라. 다만 여자주인공 역인 혜담(嵇丹)의 연기는 꽤 눈에 띄었다. 진나라 황제 역을 맡았던 배우나 남자주인공 향충(向沖)역을 맡은 배우는 총연출이기도 하고 뭔가 권력이 있어 보였다. 극단의 권력자가 연출도 하고, 뭐도 하고, 주연도 맡고.
내용은 꽤 재밌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공연 길이가 길지 했는데, 끝나고 나니 인터미션 포함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었다. 그럼에도 졸지 않고 끝까지 잘 봤다. 특히 1부 끝에 죽림칠현 중 혜강의 처형 이야기는 너무나도 흥미롭고 감동적이라, 이야기를 전해듣는 청자에 불과하였는데도 보다가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극작가가 아주 열일을 했다고 해야 하나.
나는 광둥어는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자막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주 드물게 북경어와 굉장히 유사한 발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약간 북경어 발음이 광동어 발음으로 변형되는 패턴을 유추하였다. z나 h발음이 광둥어에서 뭔가 '꼬이'같은 발음으로 변형되는 느낌적인 느낌. 아 저 발음은 광동에서는 저렇게 발음하는구나 하면서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나만의 소소한 즐거움이긴 했다.
다만, 이제부터 지적할 내용은 자막이다. 불을 뿜으며 욕할 것인지라 안전벨트하기 바란다.
자막은 영어와 한국어가 같이 나왔는데, 특이하게 영어 자막의 이름 표기는 광동어식 표기가 아니라 북경어식 표기였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의 표기법을 보면서 왓더헬이 절로 나왔다. 죽림칠현 혜강(Ji Kang)의 딸은 지단(Ji Dan)이다. 원래대로라면 혜단이었어야 한다. 아비 이름도 혜강이라 그랬다가 지캉이라 그랬다가 난리이다. 완적(Ruan Ji)의 자녀 이름은 무슨 루안페이와 루안웨이칭이었다(이름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향수(Xiang Xiu)의 자녀 이름은 시앙충이다. 죽림칠현의 후예들 이야기인 만큼 아비와 자식 간의 관계가 중요한데, 이 거지 같은 자막을 보고 아비와 자식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모르겠다.
흔히 쓰는 비빈으로 책봉한다는 말 대신 칙봉까지는 이해가능하다(솔직히 이해 못 하겠다. 왜 칙봉이라고 썼지?). 바람은 자꾸 바램이라고 쓰고, 부당함은 불편부당이라 쓴다. 아예 틀리거나 별개의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그밖에도 소소하게 이상한 것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난다.) 그러다가 가장 어이가 없었던 순간은 오석 가루였다. 영어 자막은 five mineral powder였다. 굉장히 중요한 순간에 나온 말이다. 나야 이 시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인지라 오석 가루가 어쩌니 저쩌니 하자마자, 아 오석산이라는 일종의 마약을 써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구나 하고 인식했지만, 일반인이 오석 가루가 오석산임을, 그리고 오석산이 마약인지 뭔지 어떻게 알겠냔 말이다. 역시나 나오면서 앞사람들이 대화하는 내용을 들으니 그 부분을 이해 못 해서 무슨 음악 연주가 하늘을 뒤흔들어서 탈출할 수 있었나 보다고 토론을 하더라. 오석산이라 쓴 후에 별표 붙이고 미약/마약 식으로 표기했어야 한다. 조사(祖師) 같은 단어는 별표하고 잘만 뜻풀이 하더니 오석산에는 왜 안 그랬나 모르겠다. 자막 번역자가 중국 역사에 대한 이해 없이 영어를 중역한 느낌이었다. 시대적 배경을 잘 모르는 한국 사람이라면 꽤 어렵고 복잡할 수 있는 내용인데 한국어 자막이 그 어려움을 가중시킨 느낌이다. 한국어 자막의 대 혼란과는 달리 영어 번역은 비슷한 논조로 잘 번역되었다. 보면서 어? 저 말을 저렇게 영어로 쉽고 짧게 번역한다고? 하면서 놀란 것이 여러 번.
자막이 나를 괴롭힌 순간을 제외하고는 꽤 즐거운 3시간이었다. 오페라나 뮤지컬도 좋지만, 이런 중국과 일본의 전통극 공연도 더 많아지면 좋겠다.
또제! 국립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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