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다가 꽤 괜찮은 인용구가 있길래 포스팅 한다. 사실 기사는, 왜 강성종이라는 사람이 좌파과학자인지, 그가 추구하는 좌파란 무엇인지, 그는 좌파 과학자로서 무엇을 비판하는지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 좌파 과학자가 무엇인지 등, 기사를 읽는 사람이 궁금하게 여길 질문들 중 그 무엇 하나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유일한 이 기사가 가진 의미는 전반적인 강성종이라는 사람의 아이디어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과, 다음의 인용구를 적어놨다는 것.
우리는 발전을 맹목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맹목적 발전은 반대한다.
Not blind opposition to progress, but opposition to blind progress.
환경단체의 모토라는 데 요즘 내 화두와 일치하고 있다. 나는 아쉽게도 환경보호에 별 관심이 없다. 내 정치적 성향 혹은 가치관의 기반을 두고 있는 여러가지 철학이나 '주의'들 대부분이 모두 '환경' 혹은 '자연'이라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 물질적 존재로써의 '자연'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내 관심사는 '인간'이다. 인간 이외의 자연을 구성하는 조건들이 어떻게 되는지, 다시 말해 고갈되고 있는 자원에 대한 걱정과 멸종되어 가는 동물들 그리고 환경 오염 등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드라마 Monk의 주인공인 몽크가 자주 하는 말인 "Nature is dirty"가 내 생각과 비슷하다. 내게 있어 물질적 의미로써의 자연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존재일 뿐이다. 게다가 보지도 못한 후손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없는 나이기에 후손을 위해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는 말은 씨도 안 먹힌다.
그런데 여러가지 계기로 생각이 좀 변했다. 고도의 문명과 그 온갖 파생물들을 숭상했던 기존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렇게까지 발전했어야 했는가, 이 정도의 발전이 우리에게 정말 득이 되는 건가하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아직도 물질적인 존재의 '자연'에는 그다지 애착이 없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하겠다고 만들어 낸 이 발전물들이 얼마나 자연에 큰 위해를 끼쳤는지 생각하면 어지러울 뿐이다. 과연 그 정도의 가치가 있었느냔 말이다. 요즘들어 뇌리에 자리잡고 있는 루소의 back to the nature와 노자의 무위자연, 그리고 green anarchism, 엔트로피의 증가 등등, 그간 내가 숭상해 왔던 비물질적 단계의 자연과 무시해 왔던 물질적 단계의 자연에 대한 경계가 무너져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자연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은 이미 체화되어 있어서 최근의 생각들과 심한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아직도 나는 nature is dirty라고 생각하고 있고, 온 세상의 벌레 등등은 모조리 멸종해버렸으면 좋겠고, 엄한 세균 따윈 하나도 없는 진정 깨끗한 공간에서 살고 싶은 한편,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발굴할 만큼 충분히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모순된 가치관의 충돌을 저 환경단체의 모토가 잘 융화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저런 어중간한 슬로건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 같지만, 어쨌든 내 마음은 편해졌으니... -_-;
어쨌든 강성종이라는 분에게 관심이 있다면 다음의 기사를 읽어보시기 바란다.
[화제의 책] 강성종의 <한국 과학기술 백년대계를 말한다>
▲ 강성종 박사.
강성종(Kang, Sungzong·71) 박사. 1969~70년 두 차례에 걸쳐 세계적인 과학 잡지 <네이처>에 논문을 게재한 뇌과학자(제1저자).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로 오랫동안 일했으며 1970년대에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교수도 지냈다. 1964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조국 발전에 공헌해 달라"며 권유했으나 거부하기도 했다.
황우석 씨가 두 차례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한 것만으로도 전 국민이 호들갑을 떨었던 기억을 염두에 두면, 그는 이미 어린이가 읽는 위인전집 목록에 이름을 올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강성종'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적다.
국내에서 강성종 박사는 <네이처>에 논문을 실었던 4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야인'이다. 현재 강 박사는 70세가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뇌과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만, 그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책 한 권을 고국에 선물했다. <학국 과학기술 백년대계를 말한다>(라이프사이언스 펴냄).
한국에 '좌파 과학자'는 있는가?
감히 말하건대, 이 책은 앞으로 한국의 과학기술자를 연구하는 이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자리매김할 게 틀림없다. 강성종 박사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견해는 2009년이라는 시점에 한국의 '좌파 과학자'가 가질 수 있는 입장의 극대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2~30대가 아니라 70대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강성종 박사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필요조건'임을 강조한다. 당연히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전문가'로서 과학기술자가 다른 전문가와 비교했을 때 사회 진보를 위해서 더 나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가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자들이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런 믿음은 직접 드러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강 박사가 말하는 좀 더 나은 미래가 통상적인 '과학기술' 예찬자들이 말하는 그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굴신하는 이명박 정부가 지향하는 금융 중심의 자본주의를 놓고서 이렇게 독설을 내뿜는다. 실제로 그는 투기 자본 감시에 앞장서온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산하 금융경제연구소의 고문이다.
"투자 타령 그만하고 정직하고 아껴서 쓰는 정신을 살려야 한다. 투자는 곧 빚이기 때문이다.""이명박은 그나마 조금 남아 있는 나라 재산과 금융시장을 재벌과 외국시장에 내놓겠단다. 이명박이 당선되자마자 뉴욕 금융가는 축제 분위기였다. 이유가 뭔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도, 특히 금융과 주식 시장에서 국가 경제를 높이겠다는 착상으로는 안 된다."
이런 강성종 박사의 견해는 20세기 초·중반의 영국의 좌파 과학자이자 과학사 연구자였던 존 데즈먼드 버널 등과 공명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버널은 과학의 중립성을 옹호하면서, 제대로 된 의식을 가진 사람들(사회주의자)이 권력을 잡는다면 과학은 물론이고 세상도 바꿀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또 과학기술자에 대한 강성종 박사의 견해는 버널과 같은 시기 미국에서 활동했던 사회학자 로버트 킹 머튼의 그것과 비슷하다. 머튼은 과학기술자 공동체를 다른 전문가와 달리 나름의 규범을 준수하는 특별한 집단으로 간주했다. 물론 이런 과학기술자의 상은 1970년대 중반부터 학문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
"나는 맹목적 발전은 반대한다"
사실 지금까지 살펴본 면모만으로도 강성종 박사는 한국의 과학자 공동체에서 독보적이다. 안타깝게도 저 정도의 사회의식을 갖춘 과학자도 찾아보기 어려운 게 한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과학기술자를 장기판의 '졸' 취급도 안 하는 이유는 좌우를 막론하고 저런 의식 있는 과학자가 한국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성종 박사는 앞에서 언급한 20세기 초·중반에 마련된 '진보적' 과학기술자의 전형을 넘어서는 사고의 단초를 책 곳곳에서 보인다. 당장 그는 과학기술자들이 흔히 빠지기 마련인 발전(진보)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경계한다. 그의 견해는 책의 맨 앞머리에 인용한 미국의 환경단체 시에라클럽의 좌우명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발전(진보)을 맹목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맹목적 발전은 반대한다. (Not blind opposition to progress, but opposition to blind progress.")
실제로 강성종 박사는 과학기술자라면 대개 찬성하기 마련인 '유전자 변형(GM)' 기술을 걱정한다. GM 기술을 이용한 먹을거리는 제대로 검증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껏해야 초국적기업에게 우리의 식탁을 넘겨주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는 것. 대신 그는 지역 먹을거리(local food)의 유용성을 강조하고, 더 나아가 '천적' 연구 등을 주목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강성종 박사는 서로 반목이 심한 과학기술과 사회과학, 인문과학 간의 반목을 놓고도 쓴 소리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책 전체에서 한 본보기로 제시하는)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과학자가 아닌)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나크였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그가 19년간 이 연구소를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 <한국 과학기술 백년대계를 말한다>(강성종 지음, 라이프사이언스 펴냄). ⓒ프레시안
이처럼 강성종 박사는 타 분야는 물론이고 환경단체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때 과학기술이 제 방향을 찾아서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즉, 그가 말하는 '귀를 기울여할' 과학기술자는 현대 사회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또 현대 과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육체가 아닌) '정신이 늙은' 양로원 과학기술자가 아니라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이다.
'진보 과학자'의 참모습을 보고 싶다면…
사실 기자는 수년 전 강성종 박사를 만난 적이 있다. 짧은 시간에 그는 한국 사회, 한국 과학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이 책은 그 짧은 시간에 미처 털어놓지 못한 그의 거침없는 견해를 가감 없이 전달한다.
강성종 박사의 말대로 한국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라면, 또 이 시대 '진보 과학자'의 참모습을 고민하는 이라면 꼭 이 책을 일독할 필요가 있다.
좌파라고 하니 최근 중앙일보에서 박효종 교수를 인터뷰한 '좌파에게 양심을 묻다'라는 기사가 생각나서 포스팅 한다.
도대체 카테고리에 대한 분류도 제대로 안 되어 있는 양반이 무슨 놈의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를 하고 있나 모르겠다. 이 양반이 가장 심하게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prescriptive와 descriptive의 구분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좌파가 추구하는 ideal과 그 이데올로기를 수호하는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현상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속칭 좌파들이 비양심적인 일을 한다고 해서 좌파가 추구하는 이상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예단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 사제들이 타락했다고 해서 기독교 자체가 나쁜 거냔 말이다. 게다가 좌파는 당위적으로 공산주의이고 또한 친북인가? 나는 확실히 좌파에 치우쳐져 있지만 북한 및 기존의 공산권 국가들의 행태에는 학을 뗀다. 그들은 진정한 사회주의를 구현해내지도 못했던 pseudo-사회주의 국가이다. 또한 사회주의가 대단히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주의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어디에서 좌파가 pseudo-사회주의 정치체제를 가진 국가와 친밀하고 미국은 반대한다는 아이디어를 얻은 건지 어이가 없다.
지금까지 인생에서 딱 두 번 백분토론을 봤는데 그 패널 중 하나에 박효종 교수가 나왔었는데 이 양반 이야기하는 거 보고 혀를 끌끌 찼던 기억이 난다. 벽창호 같은 느낌이랄까. 현실 감각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고 다들 착하게 살자고 주장하더라. -_-;
게다가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소위 "좌편향 교과서"가 '자학적 역사관'을 주장한다고 하는데 말을 해도 거참... 나는 좌파적 교과서를 본 적이 없지만, 좌편향 교과서에 대한 일말의 설명 없이 (즉 오해하기 쉽게 써놓고) 거기에 자학적 역사관이라는 말로 화룡점정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자학적 역사관인지 궁금할 뿐이다.
[파워 인터뷰] 좌파에게 ‘양심’ 을 묻다, 박효종 교수
“성과 속 넘나들며 속세의 일 단죄 … 정의구현사제단 굉장히 오만”
선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훈수
신앙인의 태도로 옳지 않아
좌파가 깨끗하다는 건 선입관
서울대 윤리교육과 박효종 교수의 발언들이 적잖은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정의구현사제단과 전교조를 대놓고 비판하는데 그 강도가 섬뜩할 지경이다. 천주교 사제들에 대해 “당신들이 무슨 정의를 구현하느냐”고 논박하고, 전교조에 대해선 “그런게 참교육이냐”고 날을 세운다. 그가 하고 싶은 얘기는 뭘까. 10일 오전 편집국에서 박교수를 만나 2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그는 ‘좌파의 위선’을 지적할 땐 가차없었다.
-원래는 신부가 되려고 했다죠.
“중학교 때 왜관의 분도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갔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중·고를 마쳤습니다. 그 뒤 가톨릭대에 입학했고 석사하고 군대까지 합치면 한 10년 거기 있었어요. 사제에 앞서 부제(副祭) 서품도 받았는데, 사제 서품 받기 일주일 전쯤 포기했습니다.”
-종교적 회의감 같은 건가요.
“그건 아니고, 제가 신부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지금 제 친구들은 다 신부들이고, 주교가 된 분이나 가톨릭대 교수 신부도 계십니다.”
-결혼하셨는데, 혹시 사랑 때문이었습니까.
“(겸연쩍게 웃으며) 딱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부인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아무래도 부족했던 거죠.”
-좌파는 진보라거나 우파는 보수라는 등식관계가 성립하지 않고 한국의 좌파에 ‘진보’라는 명칭이 온당치 않다고 하셨는데.
“진보나 보수는 평가적인 개념입니다. 진보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서 ‘좋은 말’로 등록돼 있죠. 앞으로 나아간다는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 보수는 수구(守舊)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져요. 보수가 이런 식의 언어게임에서 밀린 게 한 20년 돼죠. 하지만 우파도 진보가 될 수 있고, 좌파도 보수가 될 수 있어요. 1990년대 초 소련이 망하고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무너질 때 체제를 지키려던 공산당은 ‘보수파’로 불렸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전교조가 ‘정의구현’이니 ‘참교육’이니 하는 ‘레토릭’으로 정당성을 강변한다고 비판했는데 선생님이 공동대표인 ‘바른사회시민회의’도 ‘바르다’는 가치 개념을 차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 이름에 걸맞게 책임있는 행동을 하라는 겁니다. ‘바른사회시민회의’도 바른 행동을 못하면 당연히 비판받아야죠.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전교조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단체인데 이름만 앞세우면서 자기들이 하는 건 정의구현이고, 참교육이니까 비판하지 말라는 태도는 잘못된 겁니다.”
-좌파를 위선적이라고 지적하셨죠.
“그들의 주장과 행태 사이에 괴리가 많아요. 노무현 정부 때 미국 싫다는 많은 분이 자녀들은 미국으로 보내고, 아무런 설명이나 해명이 없어요. 자식이 원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데 그게 바로 위선 아닙니까. 자기는 안 그러면서 남에게는 강요하는데, 자기 식구들에게는 자기 식당 음식 안 먹이는 음식점 주인 같은 거죠. 이런 모습을 좌파 집단에서 많이 봅니다.”
-왜 그런 위선이 생겨났다고 봅니까.
“ ‘호랑이에 올라탄 사람’이 된 거죠. 좌파는 그동안 반미를 하고 친북적인 주장을 통해 중요한 정치사회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거기서 내려오는 게 두려운 겁니다. 하지만 반미·친북적 견해를 지닌 사람들, 전교조 지도부에 있는 분들이 사석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파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요. 한데 공론의 장에서는 달리 말합니다. 좌파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시 태어나려는 용기를 갖고, 그동안 잘못한 건 반성하고 잘한 건 이어가야 하는데 그게 공개적으로는 잘 안 되는 거예요.”
- 그분들이 1970~80년대에 독재정권과 싸웠고 민주화에도 큰 기여를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도 그걸 부정하진 않아요. 민주화의 공은 운동권에 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동조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민주화를 자신들만이 했다고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소위 ‘386 세력’을 보세요. 지금도 ‘독재와 반독재’ ‘민주와 반민주’라는 교조적 틀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민주주의도 참여민주주의, 시민민주주의 등 다양한 방식이 논의되고 있는데, 이걸 80년대의 구도로 협소화시키고 있어요. 과거 운동권의 노고와 고초는 충분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공’을 자신들이 새롭게 거듭날 계기로 봐야지, 그걸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서야 되겠어요?”
-우리 사회에서 성역처럼 여겨지는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해 ‘비신앙적’이라는 표현까지 써서 비판하셨는데요.
“과거에 그분들이 침묵을 깨고 이야기한 건 순교자적 용기였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서 민주주의의 질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이 특정 이념의 포로가 돼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 제가 한 비판은 가톨릭 내에서 팽배한 그분들에 대한 불만을 대변한 것뿐입니다.”
-사제들이 시국을 비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분들이 제일 잘못한 건 ‘성(聖)과 속(俗)’의 경계를 너무 자유롭게 넘나든 거예요. 속세의 일을 ‘신앙의 이름으로 단죄한다’는 건 정말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할 이야기예요. 가톨릭 신자라면 정부의 대운하 추진에 대해 전부 신앙의 이름으로 단죄해야 한다는 겁니까? 정의구현사제단이 무슨 권한으로 ‘신앙’이란 이름을 꺼내드는지, 자기들만 옳다는 독선과 아집을 속세의 세계에다 들이미는 건데, 굉장히 오만한 태도입니다.”
-사제단이 정치적이라는 건가요.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문제가 많았지만 그때는 그분들이 (정권과) 정말 친하게 지냈어요. 어떤 분은 청와대를 드나들기도 했고요. 사제들이 성의 세계에 있다면, ‘카이사르의 세계’(세속 세계)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둬야 합니다. 성의 세계에 있으면서 세속의 소금이 되려는 역할을 해야죠. 저도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어요. 하지만 성직자들이 하려면 품위있게 해야죠. 사제단의 편견이 도를 넘는다는 겁니다. 촛불시위 때 사제복을 입고 미사를 드리면서 세속에서 거룩함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건데 그렇게 성과 속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무책임한 태도가 어디 있느냐고 비판하고 싶었습니다.”
-정의구현사제단을 해체하라는 겁니까.
“사제단은 임의단체니까 해체고 뭐고 없습니다. 거기 계신 분들이 성경 구절을 생각했으면 하는 거죠. 선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훈수를 두는 건 신앙인의 태도로 맞지 않다고 봅니다. 사제단은 자기들은 무오류고, 잘못할 수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게 아니죠. 저는 이분들이 사제복을 입고 십자가를 들고 거리에 나서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리가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우리 사회에 잘못된 선입관이 있는데 ‘좌파는 깨끗하고, 우파는 부패하다’는 거죠. 사실은 저도 그렇게 믿었어요. 한데 부패에는 좌우가 없는 것 같아요. 깨끗한 우파가 있냐고들 하는데 어찌 보면 좌파가 그동안 상대적으로 깨끗했던 건 권력을 잡지 못해서 부패할 기회가 없었다는 측면도 있는 거죠.”
-소련에서도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라는 공산 귀족들이 횡행했습니다.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말이 맞는 걸까요.
“적극 동의합니다. 권력을 갖고 있으면 부패의 유혹이 너무나 크죠. 다른 방법이 없어요. 감시와 투명화를 제도화해야 하고 또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지금 청와대 계신 분들도 노무현 정부의 도덕성 추락을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디 맛 좀 봐라’ 하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노사모 사이트 등에선 노 전 대통령을 감싸고 두둔하는 댓글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런다고 보십니까.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가 사라져 누구 편이냐만 따지는 겁니다. ‘공공선(公共善)’의 개념이 없어지고 ‘정파적 선(善)’만 만연한 거죠. 민주노총 간부가 전교조 교사를 성폭행 하려 했어도 그걸 비판하면 우파가 득세하고 자기 편이 힘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패나 폭력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반드시 없어져야 할 절대악인데 거기에 대한 합의도 없는 거죠.”
-지난 10년간 시민단체들이 정치에 많이 참여해 이젠 NGO가 비정부기구(Non Government Organization)가 아니라 ‘다음 번 정부관리(Next Government Officer)’를 의미한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과거에 좌파 성향 시민단체들이 차라리 (정부에) 들어가서 하는 게 낫다는 논리를 폈는데요, 권력은 부패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시민단체는 언론 다음의 제5부로서 권력 감시 역할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봐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뒤 우파 시민단체 인사들도 정치권을 기웃거리고 있지 않습니까.
“역사란 게 있는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정권이 시민단체에 ‘러브콜’을 보내는 나쁜 선례를 만들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 와서도 그게 이어지는 악순환 비슷한 게 됐어요. 하지만 저는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건 시민단체의 정체성에 맞지 않다고 봅니다.”
-‘교과서 포럼’의 공동대표인데 좌파의 역사관이 뭐가 문제라고 봅니까.
“학술논쟁이라면 학자들이 얼마든지 의견을 내는 것이 가능하죠. 그런데 교과서는 달라요. 학생들이 국가공동체의 가치관을 배우는 겁니다. 좌파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를 다 부정적으로 봅니다. 긍정적인 것이라곤 민주화밖에 없는 거죠. 이게 균형이 안 잡혔다는 겁니다. 분단 정부는 문제였고 친일파 청산도 잘못했지만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자유민주주의, 인권, 시장경제, 법치주의 등이 강조된 헌법을 갖고 출범한 겁니다. 우리가 이런 가치를 가지고 좋은 출발을 해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다고 후세에게 가르쳐야죠. 아예 ‘첫단추’부터 잘못 끼웠다고 한다면 후세대들이 어떤 정체성을 갖겠습니까.
- 그분들이 왜 이런 ‘자학적 역사관’을 강조한다고 보십니까.
“민족의 분단이 이승만과 미국 책임이라고 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이런 교과서들에서 북한을 다루는 걸 보면 눈뜨고 봐줄 수가 없어요. 북한은 ‘우리 식 사회주의’를 가꾸는 노력을 하고 있고, 김정일이 주체사상에 정통해서 김일성이 죽자마자 권력이 자연스럽게 아들에게 갔다는 식이니….”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넘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하길 기대하십니까.
“당장 발등의 불이 경제죠. 경제를 살려야죠. 하지만 나는 반듯하고 품격 있는 나라를 만드는 데 헌신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어요. 그래야 진짜 선진국이 됩니다. 이명박 정부가 인기는 없지만 지금 초기니까 아직 희망을 걸고 있어요.”
대담=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 정리=배노필 기자 penbae@joongang.co.kr>사진=김도훈 인턴기자
박효종 교수 만나보니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독한 소리를 마구 쏟아놓을까. 서울대 사범대 윤리학과 박효종 교수(62)를 인터뷰 한 건 그런 궁금증 때문이었다. 언론에 몇차례 보도됐지만 박교수는 요새 정명(正名)운동을 벌이고 있다. 요약하면 “한국의 좌파는 진보도 아니면서 진보를 앞세워 국민들 헷갈리게 한다”는 것이다. 가장 반 민주적이고 반 역사적인 북한 세습정권을 싸고도는 좌파가 어떻게 진보냐, 말장난 집어치우고 그냥 친북좌파로 불러라, 그런 주장이다.
하지만 이정도에 불과했다면 그렇게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작 언론과 좌우파 지식인들, 심지어는 종교계까지 깜짝 놀라게 한 건 따로있다. 그동안 청와대와 집권당 대변인조차 함부로 논평하기 꺼려왔던, 사실상 우리 사회의 성역인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을 대놓고 공격한 것이다.
인터뷰를 해보니 그의 분노에는 배경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신부가 되려던 사람이고 지금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한데 정의구현 사제단이 ‘신앙의 이름’을 내세워 사실상 정치적 행위를 하는 걸 보고 참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때는 수많은 문제가 있어도 침묵하고, 청와대에 초청받아 다니던 분들이 왜 정권이 바뀌자 마자 신앙을 내세워 정치행동을 하느냐”는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정의구현’사제들의 그런 행위를 자신처럼 묵묵히 신앙생활을 하는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독한 발언을 서슴지않는 박교수는 외향적이거나 활발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살아가다가 좌편향 교과서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어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다, 다시 윤리학을 전공한 그는 “어떻게 하면 인간이 양심대로 살수 있을까”를 항상 고민한다고 했다. 하지만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도 역시 양심대로 행동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는 어진 마음, 그러니까 양심(良心)들은 대체 어디서 접점을 찾을까. 그게 궁금했다.
김종혁 문화스포츠 에디터
◆박효종=1947년생. 가톨릭대 신학부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쳤다. 신부 되기를 포기하고 서울대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 미국 인디애나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현 서울대 사범대 윤리교육학과 교수. 2000년대초부터 좌파 진영의 문제점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최근엔 대표적인 우파 지식인으로 부상했다. 우파 시민단체인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이고 ‘교과서포럼’ 상임대표다. ‘뉴라이트 대안교과서’로 알려진 『한국 근·현대사』집필에 주도적으로 관여했고 좌편향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