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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높음'과 '낮음' 高와 低의 역설
    學而時習之不亦悅乎/기타등등 2011. 7. 16. 01:10
    미주알 고주알 모든 얘기를 다 하는 친구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대화가 끊긴 와중에도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캐치해내고 있다. 전화 목소리만 들어도, 아니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에도 서로가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얘기한다. '우린 정말 고맥락 문화를 공유하는 것 같다.'고.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문화를 넘어서'라는 그의 저서에서 고맥락문화(High-context culture)와 저맥락문화(Low-context culture)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고맥락문화에서는 명시적인 표현보다는 우회적, 함축적으로 소통하는 데에 비해 저맥락문화에서는 직설적이고 명료한 언어로 소통한다. 쉽게 말하면 고맥락문화에서는 눈치와 묵시적인 행동규범을 통해 뜻을 표현하고 상대방의 의도를 인지한다면 저맥락문화에서는 구구절절 하나하나 말로 다 하고 앉아 있다는 뜻이다. 흔히 동양권을 고맥락사회, 서양권을 저맥락사회라고 한다. 

    동양권은 고맥락문화일 뿐만 아니라 고맥락에 대한 지향성도 가지고 있다. 마음이 정말 잘 맞을 때를 표현하는 성어만 봐도 그렇다. 이심전심, 심심상인, 교외별전, 염화미소 등등. 말을 안 해도 숨은 뜻을 파악하고 씨익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수준을 우리는 얼마나 추구하는가. 그래서 그런지 말로 하나하나 다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촌스럽다고 여긴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고 어떤 지식이 부족하니까 세세히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한족 출신의 귀족들이 이민족(비하의 의미에서 오랑캐라고 부르는 족속들)에게 쫓겨 강남 지방에 나라를 세우고 나서 북조문화와 남조문화에 대해 비유하기를 "북은 번잡하고 남은 간단하다"라고 평한다. 남조 사람들은 수준이 높아서 '현학~!'하고 던지면 '아하~'하고 알아듣기에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고, 북쪽 사람은 야만적이라 잘 모르기에 '이게 말이야, 현학이라는 건데 현학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가의 영향을 받은 건데 도가가 뭐냐면..." 이런 식으로 구구절절 다 설명해야 한다는 우월의식의 표출이다.  

    나라고 이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오랜 친구와 이야기 할 때도. 아니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냐? 그냥 말 안 해도 알아 들으면 안 되나? 넌 나랑 그렇게 오래 알고 지냈는데 나에 대해서 그것도 모르냐? 라고 생각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일을 요구할 때도 그것이 필요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상대방이 특정 지위에 순응하여 그야말로 군소리 안 붙이고 그저 따르기를 바란다. 특히 이런 것들은 서열이 있는 관계에서 자주 발생한다. '엄마가 하라니까 잔소리 말고 해라' '따지지 말아라' 등등.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니 점차 내 기색을 살피고 입안의 혀처럼 놀아줄 사람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도 특정 규범과 유언/무언의 윽박지름을 통해 해결하려 한다. 결국 고맥락문화는 눈치 빠름과 일정한 행동규범에 대한 순응을 추구하면서 역으로 낮은 수준의 논리력과 대화 능력을 가져온다. (사회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바실 번스타인은 특정 사회구조가 언어능력수준의 높고 낮음을 결정하고 이에 따른 계급의 고착화를 가지고 온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고맥락문화를 지향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어쩔 수 없는 고맥락문화의 수혜자이기에 눈치 빠름을 자랑하고 함축적 표현에서 상대방의 뜻을 포착해내는 능력에 자부심을 가진다. 고맥락문화가 더 세련되었다고 여기며 일일이 설명해줘야 하는 관계보다는 말하지 않아도 내 뜻을 파악해주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느낀다. 그런데 여기에 너무 안주하다보니 요즘들어 실제로도 언어 능력이 떨어짐을 느끼고 있다. 위에서 말한 친한 친구와의 대화에서도 '아 내가 그래서 그랬던 건 아닌데 걔가 딱 그러는거야!' 라고 개떡같이 말했는데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위기감을 느낀다. 친구도 같은 마음이다. 날이 갈수록 저급해지는 언어능력에 대한 우려에 우리는 개떡같이 말하고 나면 '고맥락 타도! 고맥락 타도!'를 외치기도 한다. ^^;;

    지금까지 떠들어대던 이야기는 사실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고맥락문화와 저맥락문화를 들먹일 때는 우리 사회의 지나친 고맥락문화가 야기했거나 이로 인해 야기된 서열, 눈치, 고착화된 행동규범, 논리력 부족, 명시적 언어의 부재에서 나타나는 소통의 부재, 의미의 왜곡과 오해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되니깐 말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쓴 목적은 제목에서도 보이듯이 고맥락문화와 저맥락문화에 대한 우열을 논하고 가치 판단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높음과 낮음의 역설'을 전달함에 있다. A가 높음에 따라 동일 범주에 속해있는 B가 낮아지는 것 혹은 그 역을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글의 일관성을 해치는 한이 있더라도 깍두기 마냥 다음의 이야기를 하나 더 덧붙이면서 이 글을 갈무리 해야겠다. 

    요즘 미학 오딧세이라는 책을 근 10년만에 다시 꺼내들어 읽고 있는데 이 '높음과 낮음의 역설'을 설명할 만한 일례가 있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책은 구석기인들이 그린 벽화에 나오는 동물 그림의 생생한 묘사와 높은 수준의 자연주의가 낮은 수준의 개념적 사유 때문임을 지적한다. 

    "곰브리치는 사물을 지각할 때 우리는 오로지 눈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라고 한다. 개념적 사유를 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知의 도식'을 적용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지각(視知覺) 자체가 벌써 개념적 사유라는 색안경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린이의 그림에서 벌써 우리는 시지각에 미치는 이런 개념적 사유의 영향력을 볼 수 있다. 어린이는 결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크게 그리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작게 그리거나 과감하게 빼버린다. 그들은 '아는 대로' 그리는 셈이다. 그러나 구석기 시대 원시인들은 아직 개념적 사유가 시지각을 지배할 정도까지 발달하진 않았다. 바로 이때문에 그들은 '개념적 사유'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연을 '보이는 대로' 그릴 수 있었다. 개념적 사유로 무장하지 못한 '벌거벗은 눈'이야말로 그들의 놀라운 자연주의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구석기인의 높은 수준의 자연주의가 그들은 낮은 수준의 지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역설에 이르게 된다." 

    결국 우리는 개념적 사유의 발달을 통해 추상성과 기하학적 문양 그리고 상징성에 접근하게 되었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은 잃어버린 셈이니 이 또한 이율배반적인 일이라 하겠다. 요즘 이런 각종 모순 속에서 중용을 취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다보니 쉬이 피곤함을 느껴서 이렇게 주절주절 끄적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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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