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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듣보잡, 그리고 고대 오세아니아 세계
    사람 사는 느낌으로다가/의미 2008. 6. 16. 14:39
    인터넷을 하다보면 수많은 신조어를 접하게 된다.  때로는 그 기발한 발상에 놀라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부정적인 의미에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그리고, 최근 알게된 신조어 중 가장 어이 없고, 그 함의에 기분 나빴던 단어는 바로 '듣보잡'이다.

    풀이하자면 '듣도 보도 못한 잡놈, 혹은 잡것' 이란다.

    어디 듣보잡 대학 나온 녀석, 듣보잡 선수가 검색어 1위, 듣보잡 시민의 주장... 등등 쓰임새도 다양하더라.

    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존재일 무엇인가가 혹은 누구인가가가, 단지 자신과, 더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이유로 이름붙이는 듣보잡이라는 말에 뭐 이런 잡스러운 말이 다 있나, 뭐 이런 모욕적인 말이 다 있나 했었다.

    그런데 오늘 나도 모르게 계속 머리 속에서 이 단어가 맴돌았다. 이제 며칠 후면 가르치게 될 세계사 강의를 준비하느라 아메리카 대륙과 오세아니아의 고대 문화 (혹은 문명)에 대한 강의안을 짜고 있을 때였다. 솔직히 이름 들어본 문명은 마야 문명밖에 없었고, 올멕 문명부터 발음 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Teotihuacan, Chavin, Mochica 문명을 공부하면서 아 뭐 이렇게 문명이 많아 하면서 불평하고 있던 차였다. 오세아니아 지역의 고대 문화를 공부하다가 그만 짜증이 폭발하고 말았다. 도대체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부터 시작해서 뉴기니아, 사모아, 통가, 하와이 기타 잡섬 들의 문화가 도대체 세계사에 뭔 영향을 끼쳤다고, 얘네가 뭘 했다고 이걸 세계사에서 가르쳐야 하나, 뭐가 뭔지도 모르겠고, 학자들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지들도 모르고, 학생들도 모를 이 사회들을 굳이 가르쳐아 하나 하는 생각에 강의안을 만들면서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다. 내 머리 속에서는 단 한 가지 생각, "이런 듣보잡, 확 띵가버릴까."

    그런데 생각해 보니 미국 애들한테는 한국이라는 사회, 문화, 역사도 듣보잡이다. 어디 출신이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왔다 그랬을 때, 북쪽에서 왔냐 남쪽에서 왔냐고 묻는게 미국인들의 한계다. 이해는 하지만 기분 나쁜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내 비록 무시하지는 않더라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수많은 나라들, 유럽과 중남미의 나라들, 구소련이었던 나라들의 자랑스러울 문명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내 무식의 소치로 간과하게 되고, 남쪽에서 왔냐 북쪽에서 왔냐는 어리석은 질문조차 하지 못하는 수준이라면 그들의 문화에 대해 얼마나 미안한 일이며 또한 그들에게 얼마나 모욕스러운 일이겠는가.

    내가 이 세계사 교과서를 선택한 것도 기존의 교과서가 아직도 서양 중심적인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헤매고 있을 때, 서양 중심의 사관을, 대륙 중심의 사관을, 국가 중심의 사관을, 문명 중심의 사관을 깨고 세계 구석구석에 균형적인 시선을 보내줬기 때문이 아닌가. 다른 그 어느 세계사 책에서도 다루지 않은 오세아니아의 역사를 굳이 서술한 것에 대해서 이 책의 저자가 '서양인만이 세계를 탐험했다는' 학생들의 고정 관념을 깨기 위함이라는 설명을 보고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내 나라가 미국에서 듣보잡이라고 속상해 하기 전에, 내가 다른 문화와 사회를 듣보잡이라고 무시한 적은 없나 생각해 보련다. 나한테 소중한 한민족의 문화인만큼, 그들에게도 소중한 그들의 문화일테니까. 결국 no more 듣보잡.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족. 그런데 얘네 보아하니 written language도 없는데 이걸 '역사'에 넣어서 가르쳐야 하나. 아 젠장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지리적으로 약한데 뭐 이렇게 복잡한지. 마다가스카르가 여기 있는지 처음 알았네. 그럼 뉴기니와 파퓨아뉴기니는 뭐가 다른거지? 긁적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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