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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고의 감옥
    學而時習之不亦悅乎/문사철 2012. 2. 11. 22:04
    이야기는 2006년 경남 창녕의 한 고분에서 완전한 형태의 여성 유골이 발굴되면서 시작한다. 
    16살로 추정되는 이 소녀에게는 '송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인의 무덤에 순장을 당한 가녀린 이 유골은 정강이 뼈와 종아리 뼈가 비정상적으로 튀어 나와 있었다. 짐작컨대 이 소녀는 항상 무릎을 꿇고 있었어야 했던 듯 싶다. 다시 말하자면 이 소녀는 16년 인생을 무릎만 꿇고 살다가 주인이 죽자 무덤에 같이 묻혀 그 삶을 마감해야 했던 것이다. 

    중국이나 부여에는 예로부터 순장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주인의 유고 시에 같이 묻히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가축과 다름 없는 처지였다. 어떤 유골은 허리나 머리가 잘라져 나가 있었다. 아마도 생매장 당하기 전 저항하다가 무참히 살해된 것일 게다. 그야말로 사람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고 소처럼 분골쇄신하다가 결국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아래 기사글 참조)  

    아주아주 먼 옛날 이야기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면 마음이 먹먹해지다가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인드셋이 궁금해진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구를 참아가며 고달픈 몸으로 평생 주인을 섬기다가 주인이 죽으면 따라 죽어야 하는 그들은 도대체 스스로에 대해서,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예전에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각 멤버들이 30분씩 강연을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때 이윤석 씨가 언급했던 '고양이 실험' 얘기가 기억 난다. 이야기인 즉슨, 가로 줄무늬만 있는
    바구니에서 키운 고양이는 커서도 세상에 가로 줄무늬만 있다고 생각하여 세로 줄무늬는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세로 줄무늬로 되어 있는 장애물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쩌면 어려서부터 다양한 생각을 접해두지 않으면 자기가 배웠던 것이 전부라 생각하고 다른 다채로운 생각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고의 감옥에 갇히게 될 지도 모른다. 이상한 것은, 사람은 자신의 몸이 감옥에 갇히는 것은 두려워 하면서 자신의 사고가 감옥에 갇히는 것은 굉장히 편안해 한다는 것이다.

    이리 하나 저리 하나 죽는 것은 매 한가지인데도 주어진 삶에 반항할 수 없었던 것은, 가축과 진배없는 삶을 살았던 노예들은 다른 생각을 접할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사고의 감옥에 이미 갇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고의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어쩌면 노예로서의 고달픈 삶보다 더 끔찍한 일일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어린이들에게 종교 같은 일정한 프레임을 설정해주는 교육을 반대한다. 특정 프레임에 갇혀 (즉, 세뇌되어) 평생을 살게 될 그 아이들을 보면 '송현이'를 보는 것과 같은 먹먹함을 느낀다. 아마 리처드 도킨스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었나 보다. 한 때 베스트셀러로 이름을 날렸던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의 9장 (종교로부터의 도피)에서 그는 어린이들에게 주입되는 종교 교육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소제목은 다음과 같다: 
    모르타라의 일화/신체적 학대와 정신적 학대/선택권은 아이에게/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아이들에게 자유를/문학으로 보는 성경).

    사고의 감옥이라는 것에 종교를 예로 들어 말하기가 편해서 일 뿐, 종교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특정 이념이나 체제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는 삶들도 많기 때문이다. 결국 한 시대의 소위 정상적인 사고라 함은 그 시대에 가장 잘 맞게 조직된 담론일 뿐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 담론을 그리고 시대정신을 극복한다는 게 실로 혁명적이라는 것을 알기에 특정 '주의'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송현이의 이야기는 그리고 이윤석씨의 강의는 사고의 감옥, 특정 프레임에 갇혀 사는 삶의 끔찍함을 반추하게 한다. 과연 난 어떨까. 난 과연 세로 줄무늬를 인식하며 살고 있을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어느 8등신 소녀의 죽음
    이기환 |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겸 문화체육에디터

    ‘나이 16살, 키 152.3㎝, 허리 21.5인치.’ 지난 2006년 11월 29일 경남 창녕 송현동 고분. 이곳에서 여성의 인골이 완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무덤의 주인을 따라 순장(殉葬)된 비운의 여성이었다. 고고학·법의학·인류학·생물학·해부학 등 각계 전문가가 모였다.

    ■21.5인치 개미허리 소녀 = 이들은 온갖 첨단과학을 동원, 여성의 몸을 복원했다. 겨우 16살의 소녀였다. 키도 현대의 16살 소녀(159.6㎝·2004년 기준)에 비해 6㎝ 이상 작았다. 하지만 복원된 소녀의 몸매는 요즘 여성들을 경악시켰다.

    먼저 소녀의 허리둘레. 요즘 그 나이 또래의 허리(26.2인치)보다 무려 5인치나 가는 21.5인치였다. 가히 ‘개미허리’, ‘모래시계’였다. 소녀는 8등신 미녀였다. 신장을 머리길이(19.3㎝)로 나눠보니 7.94등신이었다. 요즘 여성들의 ‘로망’이었던 것이다. 조사단은 이 소녀에게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첨단과학으로 복원한 송현이(좌)와 도굴의 화를 입었지만 온전한 상태로 발굴된 송현이 인골


    법의학 측면에서 소녀를 관찰하니 흥미로운 사실을 더 발견했다. 정강이뼈와 좌우 종아리뼈에서 비정상적인 뼈가 툭 튀어나온 것이다. 이것은 소녀가 반복적으로 무릎을 꿇고 뭔가를 했다는 이야기였다. 두말할 것도 없다. 이 가녀린 소녀는 주인을 뼈가 빠지도록 섬기다가 주인의 사망과 함께 순장됐던 가여운 신세였던 것이다.

    ■비참한 순장의 역사 = 비단 ‘송현이’ 뿐이 아니었다.

    부여는 “사람을 죽여 100여 명까지 순장시켰다.”(殺人殉葬 多者百數·<삼국지>·위서 동이전>)

    또 고구려에서는 “248년, 왕(동천왕)이 죽자 새 왕(중천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왕의 무덤에 와서 따라죽는 이가 많았다(至墓自死者甚多)”(<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순장제도는 502년(신라 지증왕 3년)이 되어서야 폐지됐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5명씩 순장했는데, 이를 폐지했다(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삼국사기>·신라본기)는 것이다.

    사람을 생으로 죽이는 행위는 예로부터 두 가지로 나뉘었다. 짐승과 함께 사람을 제사 지내는 ‘인생(人牲)’과 죽은 자와 함께 묻는 ‘인순(人殉·순장)’이었다.

    은(상)시절 사람의 머리가 담긴 그릇. 사람제사의 증거이다.

    은(상)나라(기원전 1600~1046년) 때 점(占)을 친 내용을 귀갑(거북)에 기록한 글(갑골문)을 보자.

    “당·대갑·대정·조을에게 제사 지내려는데 강인 100명과 양 100마리를 올릴까요?(御自唐大甲大丁祖乙百羌 百宰)”

    당·대갑·대정·조을은 모두 은(상)나라 왕의 조상들이다. 강인(羌人)은 중국 서북쪽에 살던 유목민들이었다.

    은(상)나라는 주변 이민족과 끊임없는 정복전쟁을 벌였다. 그러면서 사로잡은 전쟁포로들을 노예로 활용하다가 제사가 있는 날이면 그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 것이다. 문제의 갑골문은 점을 치면서 조상들을 위한 제사에 양 100마리는 물론 강족 사람 100명을 제물로 바칠 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백인으로 바칠까요?” = 피부가 하얀 사람이거나 아예 백인들이 제물로 ‘애용’됐다. 은(상)나라 때 정인(貞人·점을 친 관리)이 점을 친 뒤 그 내용을 새긴 갑골을 보자.

    “오늘 저녁 무정왕(기원전 1250~1192년)을 위한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때 피부가 하얀 강족3명을 제물로 올릴까요?(唯今夕用三白羌于丁)”
    “백인으로 요제(제사의 일종)를 지낼까요?(燎白人)”

    그래서일까. <예기>·‘단궁 상(檀弓 上)’은 “은(상)나라 사람들은 흰색을 중시했다(殷人尙白)”고 했다. 그런데 흰색을 사랑했던 전통은 은나라의 역법과 제사를 그대로 따라했던 부여까지 이어졌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등을 보면 그 내용이 나온다.

    “부여의 땅은 동이의 땅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이다. 부여는 은나라 정월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것이 가장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을 먹고, 춤을 춘다. 이를 영고(迎鼓)라 한다. ~또한 나라의 복색으로 흰색을 숭상했다. 흰옷에 넓은 소매 도포와 바지가 있다.(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在國衣尙白 白衣大袂)”

    은(상)시절 사람제사를 지낸 뒤 머리만을 거두어 모아두었다. 1976년 은(상)말기 도읍인 인쉬(殷墟)에서 발견된 191기의 제사구덩이에서는 무려 1178명의 희생자가 쏟아져 나왔다.(좌) / 목이 잘린채 묻힌 인골.(우)


    부여가 은(상)의 달력을 써서 제사를 올리고, 은(상)의 색깔인 흰색을 숭상했다? 심상치않은 일이다. 역법(曆法)은 왕권국가의 상징이다. 새 왕조가 들어서면 역법을 바꿔 ‘하늘의 뜻’에 따라 정권이 교체됐음을 알리는 것이 전통이었다. 또한 나라의 국색(國色)을 바꾸는 것도 범상치 않은 일이다. 오행(五行)에서 말하는 상극(相剋)의 원리에 따라 숭상하는 색을 정하는 일은 옛 왕조를 제압한다는 심오한 뜻도 담고 있다. 색을 바꾸면 관복도 바꿀 뿐 아니라 나라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물, 즉 마차와 제사에 쓰는 제기 등을 바꾼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에 검토할 기회가 있겠지만 부여는 은(상)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은(상)과 부여는 같은 동이족이니까.

    ■가축과 다름없는 신세 = 어떻든 갑골문에 따르면 은(상)나라 후기(기원전 1300~1046) 273년간 최소한 1만4197명이 사람제사 혹은 순장으로 희생당했다. 1976년 은(상)말기 도읍인 인쉬(殷墟)에서 발견된 191기의 제사구덩이에서는 무려 1178명의 희생자가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목 잘린 청장년이었다. 불쌍한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유골도 있었다.

    강족 100명과 양 100마리를 제사 지낼 것을 묻는 갑골.(출처:<갑골문자전 겸 갑골문 해독>, 양동숙 저, 서예문인당, 2005

    무정왕의 부인인 부호(婦好)의 묘에서는 개와 사람이 함께 순장된 채 발견됐다. 사람이 가축과 다름없는 신세였던 것이다. 청년 노예임이 분명한 인골 가운데는 머리와 허리가 잔인하게 잘린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순장 직전에 저항하다가 무참하게 살해돼 순장된 것이다.

    동양 뿐이 아니었다. 서양에서도 기원전 97년 로마 원로원은 사람제사를 법률로 금지했다. 또 1487년 멕시코 아즈텍 테노츠티틀란 보수공사 과정에서 나흘간 죄수와 노역자 8만400명이 학살된 기록도 있다. 보수한 건축물의 안정을 위한 이벤트라나 뭐라나.

    사람 제사와 순장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반인간적인 행위라는 지탄을 받을 만 하다. 하지만 당대에는 보편적인 풍습이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첨단과학으로 부활한 송현이 =생사람을 제물로 바치거나, 무덤에 밀어넣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전지전능한 하늘신과 조상제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던 시대였다. 노예제도가 성립되던 과정에서 신권사회가 여전히 극성을 부리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순장 또한 무덤 주인의 삶이 사후에도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행된 풍습이었다.

    그러나 1500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16살 소녀 ‘송현이’를 보자. 영원불멸을 꿈꿨던 무덤주인의 사후 삶을 위해 가녀린 소녀는 그만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웬걸.

    죽어서도 살기를 원했던 무덤 주인의 몸은 발견되지 않았다. 도굴꾼의 발길에 의해 산산조각 났는지, 뼈의 흔적만 살짝 남아있을 뿐이었다. 반면 완전한 상태의 인골로 남은 송현이는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 부활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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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