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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발, 폴란드 항공(LOT), 바르샤바 도착
    여행/체코-헝가리 2019. 7. 9. 14:13

     

    이렇게 긴박하게 짐을 꾸린 적이 있던가.

    특유의 준비성 때문에 여행 짐을 4주 전부터 꾸리는 편인데 이번에는 출국 당일까지도 짐을 싸지 못했다. 완벽주의 성향이 예전보다 많이 느슨해진 까닭도 있지만 날씨의 변덕스러움도 한몫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너무 추워서 경량 패딩이 어쩌니 저쩌니 하더니, 이틀 전에 프라하에 다녀온 지인은 일교차가 엄청나니 저녁 시간에는 방한을 잘해야 한단다. 게다가 날씨 예보는 여행 기간 내내 벼락 떨어지는 구름 모양. 결국 추위를 걱정하며 목도리 두 개, 재킷, 가디건 두 장을 욱여넣고 거의 모든 옷을 긴팔로 준비하였다. 

    짐을 다 싸고 간신히 3시간의 수면을 취한 후 새벽같이 출발.

    1시간 20분이면 9호선 급행과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할 수 있다. 예전에는 무조건 앉아가던 종점 근처였는데 9호선이 연장되면서 이제는 꼼짝없이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 여유롭게 나와서 긴장으로 심장 쪼일 일 없다며 룰루랄라하는데, 지인 몇 명이 부다페스트로부터의 비보를 전한다. 

    원래도 이런 비보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곤 했지만, 2014년 그 날 이후에는 더 감정이 주체가 안 된다. 당사자에게는 감히 꺼내기도 면구스러운 말이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겪었던 애통함, 무력감, 분노, 피로감, 미안함 때문일까. 흉터가 원래 살결로 돌아가지 못하듯, 마음에 난 생채기때문에 마음결이 온전치 못하다. 비슷한 일이 터질 때마다 상흔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다. 부다페스트의 소식을 접하며 연신 눈물을 훔치지만 내가 느끼는 슬픔 따위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희생자와 그들을 떠내보낸 자들의 아픔에 무슨 말을 얹으려는 것조차 죄악으로 느껴진다. 

    뭉근하게 가라앉은 마음으로 공항에 들어섰다. 내가 이용하는 곳은 제1터미널. 먼저, 예약했던 유심카드부터 수령했다. 듣자 하니 KPN유심이 잘 터진다고 하고, 전화를 쓸 일도 있을 것 같아 3G 데이터+60분 통화로 구입하였다. 실제로 EE유심을 준비한 친구보다 데이터 사용이 용이했다. 한국에서 무제한 데이터를 사용하는지라 3기가로 버틸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마지막 1기가를 다 쓰겠다며 돌아오는 환승 공항에서 동영상 다운받은 것은 안 비밀.  

    체크인 카운터 앞에 줄을 섰다. 그런데 말입니다. 줄이 절대 줄어들지 않는 겁니다. 보아하니 대기인원은 많은데 웹체크인을 한 사람들을 위한 카운터가 딱 하나 열려있다. 폴란드 항공 지상직 인원 배정 너무 한 듯.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보다 더 짜증나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대기 시간 길다고 내내 푸념하는 소리였다. 원래 두루뭉술하게 느끼던 감정이 말로 구체화되면서 감정을 형성할 때 있지 않은가. 아마 나도 친구가 있었다면 그들처럼 푸념하고 있었겠지. 나홀로 여행객의 아쉬운 소리 한번 해본다.

    나는 바르샤바 레이오버로 하루 자고 프라하로 떠나는 티켓이었다. 환승시간이 워낙 짧아 탑승객은 간신히 환승해도 짐은 연결되지 못한다는 마의 구간이라 아예 마음 편하게 레이오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른 나라에서 오는 친구와 합류하여 함께 프라하에 갈 수 있고 잠깐이지만 바르샤바 구경도 할 수 있다니 좋은 선택인 듯했다. 

    슉슉 통과하여 면세품까지 겟하고 바로 옆에 있는 스카이허브Skyhub(서편) 라운지에 들어갔다. 라운지는 생각보다 좁고 사람은 많았다. 내부에 화장실이 없다는 점도 불편했다. 따뜻한 음식도 있고 컵라면도 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허기진 배를 이곳에서 채웠지만 맛은 그저 그랬다. 나오면서 보니 라운지 앞에 누울 수 있는 큰 의자도 있고 사람도 없다. 이곳이 공항의 숨은 명당일세그려. pp카드 등이 없는 사람은 혼잡한 게이트까지 가지 말고 이 라운지 앞에서 휴식을 취해도 될 듯싶었다. 

    비행기는 보잉 787 드림라이너 기종. 기체 내부는 낡았다. 의자도 낡고, USB 포트는 충전도 되지 않고, 터치스크린 감도도 구리다. 마땅한 엔터테이너도 없어서 내가 준비해 간 동영상을 보며 버텼다. 게다가 풀북인 듯했다. 내 옆에는 노년의 남성과 혼여를 나온 듯한 젊은 여성이 앉았다. 이코노미 석에 앉으면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이유없는 적개감이 생기곤 한다. 사회적 거리가 존중되지 않는 공간에서는 예삿일 아니겠는가. 왜 자주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거야, 왜 팔을 팔걸이에 두는 거야, 등등. 그런데 이 사람들은 살짝 느낌이 다르다. 물론 자리에서는 더럽게 안 일어났지만 말이다. 특히 가운데에 앉은 초로의 남성은 비행기 여행이 익숙지 않은 듯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굉장히 특이한 경험이었다. 이유 없이 그들이 선량하게 느껴졌고, 나를 향한 적개감도 없었다. 풍진표물 도인들과 함께 하는 여행 같았달까. 그건 그렇고 습관처럼 창가를 택했지만 이제 장거리 비행에서 창가는 그만하련다.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입국심사 따위 없이 그냥 프리패스이다. 쭉쭉 걸어나와 캐리어를 받아 챙긴 후 밖으로 나오니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물 한 병 사니 내가 왔다고 한다. 외국에서 아는 사람 만나면 더 반갑지 않은가. 친구는 "너 피곤해 보인다. 머리도 떡질라 그러네"로 상콤하게 인사말을 건넸다. 아, 이노무자슥과의 여행이 시작된 거로구나.

     

사고전서의 옳게 치우치기